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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우고 '대박'…모두가 "미쳤다"던 男에게 생긴 일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고양이 화가 루이스 웨인(Louis Wain)
이런 인식을 그림으로 바꾼 화가가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 그림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루이스 웨인(1860~1939)이 그 주인공입니다. 한때 그는 영국 최고의 스타 화가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어김없이 그의 그림이 등장했습니다. “웨인의 고양이 그림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건포도 없는 크리스마스 푸딩과도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요. ‘앙꼬 없는 찐빵’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무색하게 웨인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때 영국의 국민 화가였고, 평생 고양이를 그렸던, 루이스 웨인에 대한 조금은 슬픈 이야기.
운명의 고양이
1860년 영국 런던에서 웨인은 여섯 남매의 맏이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습니다. “이 아이는 몸이 너무 약해서 학교에 가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절대 학교에 보내지 마세요.” 의사는 웨인의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웨인은 학교 대신 런던의 부두, 박물관, 공장 같은 곳들을 혼자 돌아다니며 세상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그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좋게 말하면 예술가의 자질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괴짜 기질이었지요.열 살이 넘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웨스트 런던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그곳의 교사로 채용됐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던 1880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웨인은 교사를 그만뒀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웨인의 기질에 잘 맞지 않았을뿐더러, 앞으로 어머니와 다섯 명의 동생을 먹여 살리려면 교사 월급으로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가 택한 직업은 신문과 잡지 등에 그림을 싣는 삽화가. 웨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신혼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신혼부부와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 ‘피터’가 함께 사는 집에는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에밀리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에밀리는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고, 웨인은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휴일도 없이 일했습니다. 웨인이 일하는 사이에는 고양이 피터가 에밀리의 곁을 지켰습니다.
최고의 고양이 화가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웨인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습니다. 웨인은 고양이를 사람처럼 의인화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 스케치북을 들고 가 사람들의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관찰하고, 이를 고양이의 모습으로 바로 그려내는 게 그의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웨인의 그림 속 고양이들은 파티에서 춤을 추고, 골프를 치고, 오페라를 감상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그의 고양이 그림에 열광했습니다. 웨인은 이제 영국 최고의 인기 화가였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됐습니다. 아내를 잃은 웨인은 외로웠습니다. 웨인이 떠난 후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던 가족들도 웨인이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웨인은 어머니,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에는 다 함께 해변 휴양지인 웨스트게이트온시로 이사했습니다. 웨인에게는 그림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고양이 협회 회장’으로 선출돼 고양이 권위자로도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족을 덮쳐오는 불행 속에서 웨인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미국의 고양이 애호가들과 대중은 웨인을 생각보다 훨씬 더 열렬하게 환영해 줬습니다. 그는 미국 신문사와 계약해 연재만화를 그리는 등 잠시 성공을 맛봤습니다.
이곳에서의 성공 역시 길지 않았습니다. 어리숙했던 웨인이 사기꾼에게 속아 큰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생긴 일
어느덧 웨인의 나이도 오십 줄을 넘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지도 어언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웨인의 스타일은 이미 식상해져 있었고, 영국 대중의 관심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출판사들은 그에게 새로운 그림을 주문하는 대신 옛날 헐값에 사들인 그림들을 계속 재사용했습니다. 1920년대 초 새로운 동화책 시리즈를 펴냈지만, 예전과 같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습니다.웨인의 정신도 서서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항상 조용한 괴짜로 여겨졌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의 상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웨인이 밤낮없이 망상에 시달리고, 집 안의 가구를 매일 뒤집어엎고, 한밤중에 거리를 돌아다니고, 폭력적인 행동을 벌이자 가족들은 그를 뒤늦게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1924년, 웨인은 결국 정신이상 판정을 받고 정신병원의 빈민 병동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의 나이 64세. 한때 영국의 최고 인기 화가였던 그는 이제 모두에게 잊히고 빈민 병동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이 우연한 발견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중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루이스 웨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언론들은 앞다퉈 그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웨인을 돕는 기금이 설립됐고, 당시 영국 총리 등 저명인사들이 앞장서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웨인의 고양이 그림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 큰 즐거움을 줬던 고양이 그림들을 기억하며 기꺼이 기부에 동참했습니다.
지구별 여행자
웨인의 그림은 아직도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때 그의 후기 그림이 ‘정신질환의 상징’으로 여겨진 적도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매클레이가 웨인의 그림을 멋대로 배열해 ‘정신적 붕괴가 진행되는 과정’의 예시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웨인이 남긴 업적은 명확합니다. 그는 고양이의 위상을 확 높였습니다. 그가 등장하기 전 영국에서 기피 대상이던 고양이는 웨인의 고양이 그림 이후 모두가 사랑하는 동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은 수많은 사람, 특히 어린이들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비롯해 웨인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웨인은 다른 사람을 탓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돈이 없었던 그는 늘 그림으로 음식이나 물건 값을 지불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겪은 모든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 대신, 그의 처지에 깊은 동정심을 보이며 어떻게든 그를 도우려 애썼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번 기사는 웨인의 삶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전기인 The Man Who Drew Cats(Louis Wain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