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유럽 감독들, 특히 여성 감독들 상당수가 혐오와 역겨움으로 가득한 작품들을 유행처럼 내놓고 있다. 당연히 거친 표현 수위로 넘쳐난다. 세상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늘 구토가 이는 법이다. 당연히 그 표현 수위는 적나라할 수밖에 없다.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2021)이 그랬고 코랄리 파르쟈의 <서브스턴스>(2024)가 그랬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이 있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으며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다. 그 상대의 존재를 깨닫거나 인정하는 것은 때론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늘 선한 쪽에만 그리고 아름다운 쪽에만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람이 늘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데다 대체로 악하고 추하다는 걸 알리는 건 이단과 불온에 속하는 일이다. 그건 대개 미국 할리우드의 디즈니 월드가 만들어 낸 착시이자 판타지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걸 알면서도 속고 있지 않다고 자위하며 살아간다. 그 대표적인 얘기가 신데렐라 이야기이다. 세상에 신데렐라는 없다. 사람들은 그걸 잘 알지만 그걸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영화는, 문학은, 그림은, 혹은 예술은 현실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게 하는 데 앞장서려 한다. <어글리 시스터>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 늙은이, 잔뜩 빚만 남겨 놓고 덜컥 죽어 버린다. 레베카는 돈이 필요하다. 레베카는 (물질주의적으로) 상심한다. 그녀는 자신처럼 ‘처진 가슴에 칠칠치 못한 딸까지 둘 딸린 과부를 누가 거들떠보겠느냐’고 한탄한다. 이제 그녀의 자산은 오직 엘비라 뿐이다. 둘째 딸 알마는 초경도 아직 안 한 상태다. 마침 왕자인 율리안(이사크 칼름로트)이 짝을 구하는 무도회를 연다고 한다. 엘비라는 평소 율리안이 쓴 시(도 아닌 시)집의 열혈 팬이다. 마침 잘됐다. 모녀는 모처럼 힘을 합친다.
영화 <어글리 시스터>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일단 엘비라의 치아 교정기를 제거한다. 코를 높이는 수술을 한다. 이건 인중을 망치로 찍어 콧대를 높이는 고문 의술이다. (마취 같은 건 없다) 인조 속눈썹을 실로 꿰매 붙인다. (이때는 그나마 최신 마취약이라며 코카잎 추출물을 시술 부위에 살짝 바르긴 한다) 외과 의사의 진료실 앞에는 이런 말이 써 붙어 있다. ‘아름다움은 고통이다’ 엘비라는 엄마 몰래 촌충알까지 먹는다. 뱃살을 빼기 위해서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싶고 18세기의 의학적 무지를 보여주는 얘기 같지만(당시 실제로 빈번하게 시도되던 일이라고도 한다) 신기하게도, 무엇보다 일시적으로, 엘비라는 예뻐지기 시작한다.
여성 외모의 역사, 그 잔혹사는 어쩌면 매춘의 현대사를 닮아있다는 지적이 이 영화 <어글리 시스터>에는 우회적으로 담겨있다. 여자가 예뻐지겠다는 욕망은 여성성 자체에서 발현되는 것이지만 물질적 욕망이 개입되면서 그 욕망은 거래를 위해 중요한 모토가 된다. 예뻐지면 남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자신을 좋아하는 ‘돈 많은 남자’를 찾아낼 수 있다. 매춘은 남자의 성욕을 돈으로 거래하는 직접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미인대회(무도회에서 왕자에게 알현하는 것) 역시 사실은 그 이면에 여자와 남자를 거래하되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도덕의 수준을 지키는 것인 양 위선을 떠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세상사는 다 같은데 어떤 계층, 어떤 계급의 위치와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엘비라가 성형을 하고 몸을 바꾸려고 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물적 가치를 높이려는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건 신데렐라인 아그네스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마부인 이사크와 마구간에서 섹스를 나누면서도 자기는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고 얘기한다. 죽은 아버지 오토는 성 어딘가 구석 창고에서 썩어 가고 있으며 구더기가 들끓는데도 계모인 레베카는 돈이 없다며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영화는 시체 위를 기어 다니는 구더기와 촌충알을 먹은 후 계속해서 꾸르륵 소리가 나는 엘비라의 배를 보여준다. 엄마인 레베카는 자기 몸으로 여러 비용을 충당하고 있는데 엘비라의 무도회용 드레스를 가져온 남자에게 복도 첫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레베카는 섹스 중독이지만 그걸 돈으로 바꾸는 중으로 보인다.
영화 <어글리 시스터>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온통 뒤죽박죽이다. 모두가 왕자의 눈에 들어 그에게 선택되고 그의 재산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다. 아름다움과 성(性), 돈과 지위(권력)는 동음이의어이다. 그건 18세기 바로크 시대나 21세기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성적 욕망이 물신의 저울에 올라섰던 저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은 얘기하고 있다. 물론 거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까지 숱하게 위장되고 가공된 형태의 전래동화를 과거 시대의 내재화(內在化)된 시선으로 뒤집으면 얼마나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18세기로 바라보는 21세기, 21세기로 바라보는 18세기 여성 성(性)의식의 정치학이 읽힌다. 바로 그 같은 역사적 변증법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읽힌다. 세상의 진실은 정면과 후면, 현재와 과거 모두를 아울러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어글리 시스터>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후반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이 영화의 광고문구는 ‘구두가 발에 맞지 않으면 맞게 만들면 돼’이다. 상상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 문제는 엘비라가 반대 발을 잘랐다는 것이고 엄마인 레베카가 제 짝을 마저 잘라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광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바로 동생 알마이다. 그녀는 이 드라마 전체의 인물 중 가장 이성적인 캐릭터이다. 알마는 ‘그렇게’ 영화 속에서 성장한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고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 알마는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 자신일 수도 있고 성찰을 이루어 낸 우리 자신들일 수 있으며, 세상을 직시하게 된, 그래서 포용적이기까지 된 깨우친 민중들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가 18세기에서 21세기까지 이어져 오게 된 이유는 알마 같은 존재들 때문이다.
전래동화 신데렐라 이야기를 발칙하고 파격적으로 뒤집은 만큼 올해 1월의 제41회 선댄스영화제 미드나잇 부문, 올해 2월의 제75회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됐다. 대체로 심야에 상영됐고 객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는 후문이다. 원제는 ‘어글리 스텝시스터’이다. 아그네스는 그래도 ‘본’자가 들어가는 집안 후손이지만 엘비라는 지참금이 있을 수 없는, 오로지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집안의 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CGV 체인망에서만 독점 개봉했다. 8월 28일 현재 그래도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봤다. 나름대로 선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