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프랑스의 바다를 떠올릴 때면,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해변이나, 절벽 아래로 청록빛 바닷물이 넘실대는 낭만의 코트다쥐르의 지중해를 먼저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북쪽의 오드 프랑스를 시작으로,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서쪽의 페이 드 라 루아르를 지나 남서쪽 누벨 아키텐까지, 무려 4400㎞에 이르는 해안선이 대서양과 맞닿아 있다.

이 대서양 연안의 해변을 걷다 보면, 종종 바닷가의 언덕이나 모래사장, 때로는 바닷물 속에 반쯤 잠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마주치게 된다. 주변의 자연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아 흉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구조물들은, 어디선가 떠밀려온 잔해 같기도 하고, 건설이 중단된 건물의 일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Cyrille Corlays, NAVER AGAIN, Cayeux-sur-Mer / 사진. © Cyrille Corlays / näutil
Cyrille Corlays, NAVER AGAIN, Cayeux-sur-Mer / 사진. © Cyrille Corlays / näutil
이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건설한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의 일부이다. 독일은 프랑스 점령 이후, 연합군이 영국에서 프랑스 해안으로 상륙할 가능성에 두려워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독일군은 스페인 국경을 따라 프랑스 해안선 그리고 노르웨이 북부에 이르기까지 유럽 서해안을 따라 8000여 개의 방어 시설, 일명 블록코스(Blockhaus) 또는 벙커(Bunker)를 건설했다.

이 블록코스 안에는 환기 장치, 무기, 통신 장비 같은 각종 군사 설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도난당하거나 철거 혹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많은 블록코스가 폐허로 남아 있지만, 일부는 그 역사적, 조형적 가치를 인정받아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또한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블록코스는 단순한 역사적 유산을 넘어,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대서양 해안선을 따라 자리한 이 구조물들은 지난 80여년간 어느새 프랑스 해변 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해안 침식 현상 속에서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바닷물이 점점 해변을 침범하면서 모래사장은 조금씩 사라지는데, 해변에 위치한 블록코스들이 이 과정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ap Ferret / 사진. © Guillaume Bonnaud/SO
Cap Ferret / 사진. © Guillaume Bonnaud/SO
해변에 누워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해변의 휴식처

블록코스는 마치 거대한 수중 괴물 같기도 하고, 바닷가에 좌초된 배의 잔해처럼 해변 한가운데 놓여 있다. 바닷물이 밀어 온 모래에 둘러싸여 마치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자연과는 이질적인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때로는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해변의 불청객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블록코스는 해수욕이나 서핑을 즐기러 바다에 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위에서 햇살을 만끽하며 일광욕을 즐기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색다른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저 멀리 바다 끝으로 지는 석양을 감상하는 전망대가 되며, 수평선 멀리 지나가는 선박을 관찰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연인들에게는 낭만적인 은밀한 장소를 제공하기도 한다.
유럽 최대 누드 해변촌 Euronat / 사진. © Anthony Baratier
유럽 최대 누드 해변촌 Euronat / 사진. © Anthony Baratier
전쟁 유물에서 대지 미술로 승화된 블록코스

전쟁이 끝난 뒤, 방어 기능을 잃은 블록코스는 오랜 시간 동안 해변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조물들은 사진작가들의 인기 있는 피사체가 되었고,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예술가들의 관심도 점차 끌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햇살과 모래와 바닷물 그리고 비바람에 바랜 블록코스를 몇 년에 한 번씩 새롭게 단장하여 바다를 배경으로 한 조형 예술 작품으로 매번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다.
[좌] Lacanau / 사진. © 정연아 [우] Cap Ferret / 사진. © Marion B
[좌] Lacanau / 사진. © 정연아 [우] Cap Ferret / 사진. © Marion B
Vensac / 사진. © Séverine Guillemet
Vensac / 사진. © Séverine Guillemet
블록코스 미루와(Blockhaus Miroir, 거울 요새)는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Dunkerque) 인근 르프랭쿠크(Leffrinckoucke) 해변에 자리한 폐허 벙커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무명 예술가 베르트랑 세갱(Bertrand Seguin)은 2014년부터 2년간 350m2에 달하는 벙커 외벽을 수백만 개의 거울 조각으로 하나하나 덮어 나갔다. 이 작업을 위해 사용된 접착제만 해도 약 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결과, 거대한 콘크리트 요새는 반짝이는 거울 모자이크로 뒤덮여 주변의 하늘과 바다, 모래사장을 고스란히 반사하며, 전쟁의 아픈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킨 상징적인 조형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행정 기관의 허가 없이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예상외로 지역 주민과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얻어 관광, 사진 명소가 되었고, 결혼식 혹은 뮤직비디오의 배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이후에는 자원봉사자와 예술 애호가들이 작가와 함께 정기적으로 보수 작업에 참여하면서 공동의 예술 공간으로 성장해 갔다.

하지만 해풍, 염분,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작품은 점점 손상되었고, 유지, 보수에 드는 비용과 노동이 작가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지방자치단체의 일부 제안도 있었으나, 유지 책임과 비용 문제, 그리고 떨어진 거울 조각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몇 년간 철거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진 끝에, 2021년 초 결국 블록코스를 덮고 있던 모든 거울 조각이 회수되어 폐기되었고, 지금은 아쉽게도 콘크리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Bertrand Seguin, REFLECHIR, Dunkerque Leffrinckoucke / 사진. © Marc Demeure - VOIX DU NORD/MAXPPP
Bertrand Seguin, REFLECHIR, Dunkerque Leffrinckoucke / 사진. © Marc Demeure - VOIX DU NORD/MAXPPP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림, 스케이트 보딩, 서핑, 그라피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가고 있는 시릴 콜레이스(Cyrille Corlays)는 작가명 노이틸(näutil)로 활동하며 특히 프랑스 북부 대서양 연안의 블록코스에 그라피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바다와 자연 속에 놓인 블록코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유로운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Eye'는 쉘부르 해안의 같은 블록코스에 그려진 작품으로, 완전히 뜬 눈, 반쯤 뜬 눈, 감은 눈 등 세 단계의 눈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마치 스트리트 아트가 그렇듯이 영구적이지 않은, 변화하는 일시적 랜드 아트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Cyrille Corlays, THE EYE, Siouville-Hague / 사진. © Cyrille Corlays / näutil
Cyrille Corlays, THE EYE, Siouville-Hague / 사진. © Cyrille Corlays / näutil
프랑스 남서쪽 매독 해변과 캅 페레(Cap Ferret) 해안선에는 블록코스와 벙커들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그중 디안 바르텔레미(Diane Barthélemy)는 캅 페레의 오리종(Horizon) 해변에 쿠바 여행과 꿈, 그리고 빛을 향한 투쟁을 상징으로 한 원색을 사용해 거대하고 어두운 블록코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좌] 디안 바르텔레미, SOLARGATE, Horizon Cap Ferret [우] 디안 바르텔레미, PORTE DU SOLEIL, Dunes of Keremma / 사진. © DB STUDIO New York & Paris
[좌] 디안 바르텔레미, SOLARGATE, Horizon Cap Ferret [우] 디안 바르텔레미, PORTE DU SOLEIL, Dunes of Keremma / 사진. © DB STUDIO New York & Paris
프랑스 대서양 해변 특히 캅 페레의 해변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매년 2미터 이상씩 줄어들고 있으며, 바다에 가장 가까운 블록코스는 이미 3분의 1가량이 바닷물에 잠긴 상태다. 침식이 계속되면 머지않아 이 벙커들도 파도에 완전히 삼켜져 사라질지도 모른다.

파리=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