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럴 때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게 흔히 말하는 ‘질투’라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초연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 사람을 뛰어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비교가 지나치면 화가 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우리는 생을 돌아보며 세상이 야속했다고 말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할까? ‘난 그럭저럭 착하게도 살았고 나름 열심히도 살았는데 돈만 나를 피해 가는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생각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차례대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초상화 / 출처. Wikimedia Commons
푸시킨의 시를 읊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온 날을 생각하며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푸시킨이 쓴 희곡 단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보며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본다. 그의 희곡에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 독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둘 간의 관계를 그렇게 보지 않는 게 다수설이다. 살리에리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뛰어난 음악가였다. 모차르트 이후의 유명하고 위대한 음악가들, 예를 들면 베토벤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렇게 뛰어난 그였지만 그 역시도 하늘이 내린 천재, 모차르트 앞에선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정말 노력파였던 살리에리는 오랜 시간을 열심히 고뇌하고 머리를 써서 만들어낸 훌륭한 곡보다, 모차르트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영감을 받아 겨우 몇 분 만에 지어낸 곡이 훨씬 더 훌륭한 것을 보고 비통한 심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독살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도가 넘치고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
음악의 재능을 타고난 살리에리도 모차르트를 보면서 동경, 감탄, 놀라움과 열등감으로 신을 원망했을 수 있다. 그래서 살리에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신이여, 저에게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요…”
신이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모차르트가 아니라 바로 너 살리에리야.”
신을 책망하며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 질투하는 살리에리의 열등감은 누구나 한 번쯤은 접할 수 있는 일반적 이야기다. 이는 ‘살리에리 증후군’으로 표현된다. 중요한 건 스스로 그것을 어떻게 푸는가이며, 이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보다 훨씬 많다. 만약에 이 세상에 모차르트 같은 인물로 넘쳐흐른다면, 그 천재성으로 세상이 미쳐서 돌아갈지도 모른다.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 컷 / 출처. IMDb
세상은 모차르트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세상이 모차르트를 기억하겠지만, 전쟁터에서 죽어간 이름 모를 무수한 의병들을 보면 그들 평범한 이들의 삶이 훨씬 좋았을 수도 있다. 1984년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 역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며 그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질투로 고통받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 모차르트는 사교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며 뛰어난 음악을 창조하는 반면, 살리에리는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와 명예에 애를 태운다. 결국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과 천재성을 질투하게 되고 그를 파멸시키려는 결정을 내린다. 푸시킨의 희곡과 맥락이 비슷하다. 영화는 모차르트의 생애와 그의 음악, 그리고 살리에리와의 갈등을 통해 예술과 질투,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살리에리의 애절한 대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모차르트를 회상하는 독백에서 빛난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소. 모차르트... 그의 이름을 안 순간부터 내 뇌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소. 그가 황제를 위해 연주할 때 난 유치한 장난이나 하고 있었소. 심지어 교황 앞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조차 말이오.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질투를 했었소.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준 아버지가 부러웠소. 나의 아버지는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소. 내가 모차르트처럼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왜 원숭이가 되려고 하느냐고 말했소. 내가 곡예사처럼 널 끌고 다니면 좋겠냐고 하더군. 오... 도저히 음악에 대한 나의 열정을 말할 수가 없었소. 아버지가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난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했소. '주여,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해주소서. 음악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나 자신 또한 영원히 추앙받는 작곡가가 되게 해주소서. 제가 죽은 후에도 저의 작품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당신께 저의 성심과 근면과 가장 겸손한 마음을 평생 바치게 해주소서. 아멘.' 그리고는 기적이 일어났소! ... 보잘것없는 시골 소년이 비엔나로 오게 됐던 것이오. 음악의 도시!”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 컷 / 출처. IMDb
결국, 영화 <아마데우스>와 푸시킨의 희곡은 예술가의 내면적인 갈등과 천재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질투와 고통을 공통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고전 문학과 영화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니 세월이 흘러도 질투는 많은 사람의 살아가는 힘인가 보다. 독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푸시킨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정에 반하는 증거가 나왔다. 오랫동안 분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이 체코의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다행이다. 세상은 천재와 조금 덜 천재인 자와 그렇지 않은 여럿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 많은 모차르트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것 같다. 2등의 질투에 질식해버린 천재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죽어도 1등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의 고통은 영화나 연극으로 족하다. 1등만 행복한 세상은 아니지 않나.
세상이 천재로 가득하다면 잘난 맛에 세상이 미쳐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저마다 다른 색깔의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세상은 살 만하다. 사람들이 다양한 것처럼 부자들의 색깔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들이 맨 넥타이와 스카프가 다른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처럼 재정적 곤궁으로 어렵게 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천재도 2인자도 결코 행복한 말년을 보내지 못했다. 우리가 1등도 2등도 아니라도 행복할 이유는 수만 가지다. 모차르트의 7번 소나타를 듣는데, 밝은 장조 뒤에 이어지는 그의 슬픈 이야기가 가슴을 적신다.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 컷 / 출처. IMDb
경제학에서 ‘차선의 이론(Theory of the Second Best)’이 있다. 이는 선택의 기로에서 최대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러 대안 중에서 선택하는 과정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흔히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론에 따르면 최선이 아닌 차선책끼리는 어느 것이 우월한지 알 수 없다. 두 번째 좋은 것을 얻는 것이 세 번째 좋은 것을 얻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인생에 대입하면 어떨까? 더 나은 것을 얻는 데 집착하다가는 얻지 않는 것만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교훈이 도출된다. 경우에 따라 2인자로 만족하며 살거나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집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살리에리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최대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모차르트의 음악이 주목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이는 선택의 순간에서 살리에리가 차선의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차선의 이론의 맥락에서 살리에리는 대안으로 자신의 음악적 경로를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경이로운 재능을 인정하고 그와의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더 나은 음악적 성과를 이끌어내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질투와 비교의 감정이 그의 선택을 왜곡시키고 결국 그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잃게 된다. 희곡이나 영화와는 달리 실제 그의 삶은 모차르트와의 멋진 콜라보를 꿈꾸지 않았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 컷 / 출처. IMDb
여하간 우리는 여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찾을 수 있다. 삶의 여러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종종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방식을 취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영화 속 살리에리처럼 다른 사람의 성공에 질투하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차선의 이론은 우리에게 각자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되, 남의 성공을 질투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자신의 삶을 빛내는 선택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평범한 많은 이들의 삶이 더 충만해지고 사회 전체가 더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길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인간으로서 삶의 축복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