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방에는 환하게 네온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 바닷빛 유리판 위에 보석 같은 별들이 천천히 돌아가고”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속 문장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눈으로 좇던 유년 시절, 조반니의 환상 속 밤 기차 여행에 동행하고 싶었다. 몽환적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최근 초현실주의를 품은 두 회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근대의 송혜수와 현대의 이혁이 그려내는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본다.
꿈속의 영혼을 부르는 근대의 몸짓
송혜수 <설화>(1942), 캔버스에 유화 물감, 50.3 × 60.7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비가 오는 지난 5월의 토요일이었다. 눅눅한 날씨에 기운이 처진다. 몸을 일으켰다. 맘에 둔 전시를 보고 싶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이다. 덕수궁으로 향한다. 전시실로 들어섰다. 어둡다. 덕수궁관이 밝은 편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날씨의 영향일까. 전시의 제목 때문일까. 유난히 더 캄캄한 느낌이다. 제1전시실에서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흐름 중 초현실주의로 묶일 수 있는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익숙했다. 이중섭, 김환기, 박래현 등 좋아하는 근대 작가들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은 낯설었다. 이쾌대의 초상화가 리얼리즘의 반대인 초현실주의로 읽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속상하네’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근대 미술을 전공했음에도 어렵기만 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첫 전시실의 마지막 섹션을 돌아볼 때였다. ‘으악 무서워’라는 여학생들의 소리가 들린다. 고요한 공기를 찌른다. 눈을 쫓았다. 작은 그림이 보인다. 송혜수의 작품 <설화>(1942)다. 황토색만 가득하다. 원색은 끼어들 틈조차 없다는 듯 오직 하나의 색감이다. 20세기 초 한국 근대 미술계의 유행이자 논쟁이었던 조선 향토색인가? 라며 색감에 집중했다. ‘아니 어떤 부분이 무서운 거지?’라는 의문으로 그림에 다가서 본다.
평범하다. 화면 앞쪽에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물동이를 머리에 인 여인이 걸어간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소에 올라탄 채 긴 담뱃대를 물고 있다. 현실적인 묘사다. 계속 궁금해진다. 숨은그림찾기 같다. 좀 더 눈을 가깝게 맞춰본다. 흠칫했다. ‘귀신인가?’ 뒷걸음질을 쳐본다. 주저앉은 여인이 있다.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겨우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비석이다. 슬픔이 전해져 온다. 무슨 사연인지 알지 못할지라도. 여인의 옆에 어떤 대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겁이 난다.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렵다. 무서워졌다.
‘이중섭’의 친구로 ‘소와 여인’을 자주 그린 화가. 그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송혜수에 대한 전부다. 대학원 근대 미술사 수업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다.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가 주류에서 비껴서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지나쳤던 걸까? 좀 더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근대 화단의 거장이 되기에 서사가 살짝 약하지 않나 싶었다.
그 오랜 마음이 달라졌다. 신비로움에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의 성격이라고 할 때, 1전시실의 여러 근대미술 작품 중 <설화>가 가장 강렬했다. 함께 전시된 이중섭의 드로잉 속 뒤틀린 자세의 소의 형상, 김환기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도형들이 떠다니는 추상화보다 더 찌릿했다. 여성의 사라질 듯한 몸짓에 마음이 덜컹한다. 순도 높은 황토색은 축축한 감정을 끄집어낸다. <설화>는 이내 현실의 바깥으로 데려다 놓았다. 저 멀리.
“소학교 시절 미술 과목 낙제를 3번이나 했다” 송혜수의 고백이다. 1978년 대학교 학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다. 예상을 뒤엎는다. 우리 근대 미술사의 여느 이름난 화가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공식을 따라온 그다. 일본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사립미술학교의 자유로움은 그와 잘 어울렸다. 이중섭과 어울렸고 그에게서 일본 작가 츠다세이슈(津田正周)를 소개받았다. 그는 주장했다. '순수예술 정신과 자유로운 발언 형식을 기본으로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자' 결국 서로를 알아본다.
<부친상>(1939)에는 얼굴의 일부만 담겼다. 쪼개진 듯 긴 좁은 화면이다. 인물화인데 어딘가 이상하다. (일반적인 인물화와 다르다)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의 작품이다. 좁다. 숨통이 조여 온다. 얼굴이 쪼개어, 억지로 가둬버렸다. 생경하다. 사실적인 구상화임에도. 슬픔에도 파격이 깃들었다. 여정이 시작되었다. 송혜수는 기존의 문법을 걷어찬 자유로움을 선택했다. 재학 중 ‘독립미술가협회전’, '자유미술사협회전'에 출품해 수상했다. 당시 작품인 <이조시대>(1942) 속 사람들은 뭉개졌다. 눈, 코, 입 그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다. 섬뜩하다. 익숙한 조선인들임에도 무척 낯설다. 현실 너머에 어느 곳으로. “색채(色彩)에는 환(幻)상적(想的)인 『촤—밍』이 잇다” 1939년 일간지에 실린 유학 시절 송혜수 작품에 대한 평가다. 화가이자 비평가인 정현웅이 썼다. ‘환시적’이라는 단어가 초현실주의의 속성을 설명한다면, 송혜수의 그림은 그에 어울린다. <이조시대> 그림 속 민족의 한이 흩어진다. 가닿은 곳이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이 아닌 찬란했던 조선의 어느 날이기를.
그는 떠돌았다. 평양에서 서울로 넘어왔다. 예술가의 자아를 펼쳐내고자. 일본으로 향했다. 급진적이고도 새로운 미술에의 욕망을 품고. 귀국 후 만주로, 부산으로 또 미국으로 훌쩍 떠나기도 했다. 다시 표현하겠다. 그저 유영하는 삶이었다.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은 채로. “70세의 노인이 빨간 양말에 디스코를 추고 다니셨다”, “부산 남포동에 가면 제일 눈에 띈다. 장발에 댕기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돈키호테>(1959년) 속 앙상한 뼈대의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어디론가 돌격 중이다. 그는 누구일까. 송혜수 그 자신이 아닐까. 환상을 좇는다. 송혜수의 시선 끝에는 풍차가 있을까 아니면 괴물들일까. 문득 소리치고 싶다. 허무맹랑하지만 꿈꾸고 싶다. 자유로이, 제멋대로.
<설화> 속 인물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차마 처음에는 보지 못한 아니, 보기가 두려웠던 쓰러진 여인의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용기를 내리라. 한 남자가 걸어온다. 상투 머리를 하고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등줄기가 어깻죽지가 뜨끔해진다. 피하고 싶지만 또 이 세계를 알고 싶다. 마법에 걸린 듯 빨려 들어간다. 남자를 향해 날아가는 형상이 보인다. 새가 맞을까. 아니다. 혼령의 몸짓으로 보인다. 비천(飛天)일까.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예측할 수 없다. 문득 질문하고 싶다. 알 수 없음은 초현실적인 것일까? 예측할 수 없음은 리얼리즘이 아닐까.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설화>는 복원된 유화다. “상태조사를 위해 X-선 촬영을 했습니다. 놀랄만한 사실을 알아냈죠. 현상된 작품 필름을 보니 <설화> 속에 또 다른 형체의 그림이 보이는 거예요.” 2004년 전시를 위해 <설화> 작품의 수복(修復)을 담당했던 전문가의 고백이다. 1942년 유화가 속삭인다. 초현실의 경계에서. 보이는 것 너머에는 실재가 있고 여기에 없으나 어딘가 존재하는 진실이 있음을. 현실과 환상, 사실과 공상의 경계선은 직선이기보다 곡선이리라. 송혜수가 그려낸 황톳빛 가득한 황량한 공간으로 걸어간다. 눈이 따끔거린다. 매캐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벗겨내고 헐어낸 현실 세계의 이상향
이혁 <행려도 Traveler>(2025), 캔버스에 혼합재료, 227 x 290cm, 두손 갤러리 • 이혁 제공
정동길을 좋아한다.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돌담길을 걷다 보면 계절 마디마디의 결을 느끼게 된다. 덕수궁 길을 동그랗게 돌다 보면 숨결을 마주하게 된다. 근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그 길의 끝에 예스러운 벽돌 건물이 있다. 차분한 붉은 벽돌이 말을 건넨다. 두손 갤러리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지난 5월 말, 여름을 재촉하는 싱그러운 어느 날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휘갈긴 듯한 필치 어두운 색감의 그림으로 채운 전시 현수막이 보인다. ‘쨍한 날씨와 어긋나네’ 혼잣말을 하며 고풍스런 문을 열었다. 《나는 어둠을 그리지만, 빛을 그린다 Where Shadow Meets Light》 이혁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황폐하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든 첫 느낌이다.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다가설수록 살짝 겁이 난다. 보기 힘든 도상들이 있을까 봐. 다행히 무섭지는 않다. 그저 황량할 뿐이다. 무겁고 짙은 작품에도, 옅고 가벼운 색감의 그림도 모두 그러하다. 독특한 전시실의 구조다. 좁은 통로를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네 개의 벽 사이사이로 그의 회화가 펼쳐진다. 베일 듯한 붓질이 휘몰아친다. 쓸쓸해지려 한다.
기분에 휩싸일 찰나였다. 캔버스가 녹슬었나? 싶었다. 괜스레 눈을 비벼본다. 더 잘 보일 뿐이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듯 그려진 캔버스 전체가. <행려도 Traveler>(2025)와의 마주함이다. 가로가 3m에 달하는 대작이다. 산수화이다. 다르다. 빼어난 경치도 아니고 여유로운 풍경도 아니다. 여기는 어딜까. 자세히 보니 험난한 산 중턱의 한 지점인 듯도 하다. 예민한 편임을 알고 있기에, 우울의 강도를 높일 만한 것들에서 떨어지고 싶다. 좋아하는 그림일지라도. 돌아서고 싶다. 문드러질 듯한 이 장면에서. 찬찬히 바라보고 싶다. 벗겨진 길 위의 틈새들을. 두 마음이 충돌한다. 격렬하게. 발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짓이겨진 풍경이 공격한다. 여기에 머물라고. 붙잡혔다.
알고 싶었다. 여행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황금빛의 산자락에 숨어있을까. 회색빛 길에 쓰러진 걸까. 혼란스럽다. 작품의 명제와 어긋난다. 이 장면은 현실이 아님을 거친 붓질을 통해 강조하려는 걸까. ‘무의식의 여정’이라고. 초현실주의라고 쉽게 단정하고 싶지 않다. 오기가 생겨난다. 깎이고 헐벗은 듯한 절벽 속 여행자를 찾고 싶다.
더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춘다. 왼쪽 아래 끝에 형체가 있다. 지워내려는 듯이 희미하다. 무엇인지 한눈에 알기 어렵다. 회색 조의 무채색을 파고들어가 본다. 한 마리의 개가 있다.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오묘하고 기이하다. 제거된 듯 살아있다. 숨은 듯이 드러나 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개에게 물어본다. ‘발 디디고 있는 이 거칠고 피폐한 땅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냐고’
“버려진 개의 몸을 통해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이혁의 고백이다. 어떤 꾸밈도 없다. ‘사연이 있는 걸까’ 의문이 든다. 그는 북에서 왔다. 탈북자다. 2006년 19살에 탈북했다. 중국에서 불법체류 노동자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2009년 한국에 도착했다. ‘나’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를 위해 살았다. 부단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화가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죽음 후 깨달은 바다. 이혁은 북한에서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았다. 붓을 들고 싶었다. 한 번 더 다시. 깊게 내재한 바람은 기다린다. 등 돌린 이가 쫓아와 주기를. 어둠 속에서도 불빛을 내며. 다행이다. 이혁이 그 빛을 외면하지 않아서. <행려도 Traveler> 속 긁히고 뜯겨버린 산세(山勢) 속 황금빛이 반짝인다. 문득 나의 바람에게도 물어본다. ‘내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혁의 그림 속의 개처럼 비틀거리며 걸을지라도.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상상’, ‘이상향에 대한 동경’ 초현실주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행려도 Traveler>는 이에 충실한 그림이다. 타인에게는 눈속임이 가능하다. 겉으로 매끈한 웃음을 지으면 된다. 다만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감정의 밑바닥에 숨은 추악함과 그 뒤엉킴을. 이혁이 그려낸 켜켜이 뜯겨지고 무참히 헐벗은 공간이 다르게 보인다. 더 이상 초현실적인 ‘이세계(異世界)’가 아니다. 나쁜 꿈의 한 장면으로 보이던 <행려도> 속 개의 눈에서 어제의 초라한 나를 만난다. 고맙다. 상처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혁이 그려낸 풍경이. 멋스럽다. 탈북자가 아닌 미술가로서 이혁의 솔직한 자아가. 이 켜켜이 긁어내고 무수히 발라낸다. 이혁은 회화의 재료를 실험하고 마음껏 펼쳐내는 중이다. 10년이 넘는 단절의 시간을 메꾸듯이. 북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 장르만을 학습한 그의 회화는 변화하는 중이다.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두 개의 현실을 목격한 그다. 북에서는 남조선(그는 인터뷰에서 여전히 남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이란 ‘꿈의 세상’이었다. 이제 그는 두고 온 기억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꿈꾸리라.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이상향’일까. 두 세계가 만나는 공간이 여기 있다. 각자의 바람은 다르다. 다만 간절한 마음으로 행려하리라. 바라마지 않는 어떤 초현실의 먼 곳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행려도 Traveler> 속 개가 움직인다. 어둠을 뚫고. 살아가리라.
현실에 꿈을 얹는 날들에게
현실에 냉소를 얹기는 쉽다. ‘그게 되겠어? 비현실적이야’라고 말하고 돌아서면 된다. 행복에 작은 트집을 잡는다. 불행은 곧바로 자리를 차지한다. 근대의 송혜수는 핍진한 시절 그림 속 비천(飛天)의 몸짓으로 초인적인 힘을 그려냈고 현대의 이혁은 스스로 경계를 넘어 현실 너머의 바깥이라 믿던 세계에 스스로 도착했다. 열기가 식지 않는 날들이다. 여름밤에 나의 꿈을 새기리라. 초현실주의 회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