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만서도, 때때로 글을 쓴다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곤 한다. 특히나 에세이를 쓸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인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게다가 에세이라는 것이 각자의 일상과 내밀한 생각을 기록하는 일기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의 일기 같은 글을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나는 이런 글을 왜 쓰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는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게다가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브런치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상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채널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에세이를 ‘읽는 것’을 넘어 에세이를 ‘쓰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대체 일상을 기록한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이토록 사로잡아 읽고 쓰게 만드는 것일까?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국립정동극장이 올해 세실 창작ing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보인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은 200여 년 전에 쓰인 일기로부터 그 답을 찾아간다. 무대에 선 네 명의 배우, 그리고 세 명의 악사들은 관객들과 함께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주(1755~1788)가 13년간 매일같이 써 내려 간 일기, 『흠영(欽英)』을 읽어 내려간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을 꿈꿨지만, 결국 조정에 진출하지 못한 유만주는 한량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가 사관을 꿈꾸었던 것은, 역사의 기록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야망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 흘러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애정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일로 이어진다. 21살의 나이에 시작해 33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맞은 죽음의 순간까지 그는 매일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그의 시간들은 2025년의 관객들 앞에 되살아난다.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그의 일기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공부방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자리를 잡은 야생화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재미있는 책을 얻어 읽기 위해 친척의 집으로 향하며, 하루하루 흘러가는 나날들을 고스란히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그야말로 그가 살아온 시간을 함께 나누는 셈이다. 그가 꿈꾸었던 ‘사관’이 되었다면 절대로 기록하지 못했을, 사소하지만 분명한 행복이 있는 시간들을. 이러한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 써보았을 법한 일기나 SNS의 일상 기록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여기의 관객들로 하여금 조선시대를 살아간 어느 선비의 일상을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공감의 물결에 출연진들이 앞장선다. 연주자와 배우들은 실제 자신이 과거에 썼던 일기를 공유한다. 동경했던 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며 뮤지션이 되기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대학교 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었던 코멘트를 기록한 연기 일지를 다시 들춰본다. 일기가 공개된 이들은 비밀을 들켜버린 듯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 시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심을 떠올리는 아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썼던 일기들을 잠시나마 떠올리며 일상의 기록들을 읽는 것의 다시 읽는 경험에 간접적으로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유만주’라는 사람의 일기를 2025년에 다시, ‘함께’ 모여 꺼내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사람도 아니고, 이전까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비록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양반가 출신의 문인이라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인 만큼 굳이 우리가 또다시 양반의 일기를 함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진들은 작품의 시작점에서부터 이러한 의문의 가능성에 대해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앞으로 이어질 유만주의 일기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관객들이 가질 법한 여러 질문들을 먼저 제시한다. “일기가 너무 공감이 된다”라거나, “저 얘기가 꼭 내 얘기 같은데?”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에서부터, “대체 이걸 왜 봐야 하지?”, “너무 지루하다”와 같은 관객들의 의문과 비판까지도 포함한다. 그러고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것도 옳습니다”라며, 관객들이 제각각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 자체로 존중한다는 뜻을 밝힌다. 자신의 일상을 담아낸 글쓰기에 정답이 없듯이, 그것을 함께 읽는 사람들의 생각 또한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만주라는 사람을 몰라도 괜찮고, 꼭 공감할 필요가 없다”라는 입장을 명확히 하며, 공연에서 대본이 가진 절대적인 지위를 가뿐하게 내려놓는다. 무대와 객석,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해체하고 “모든 사람의 생각이 옳다”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정답” 같은 해석과 감상을 포착하기 위해 애쓰는 관객들이 더 가볍게 공연에 빠져들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럴듯한 서사가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함께함으로써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수평적인 상호작용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어느 볕 좋은 날>의 메시지는 일기의 ‘함께 읽기’를 넘어 ‘쓰기’라는 더 적극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품 초반에서 보여주었던 다정한 장면들과는 대조적으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말년의 일기를 소개할 때면 점차 그 소재가 무거워진다. 결국엔 조정에 진출하지 못하고 친척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멸시를 받기도 하고, 해마다 기울어지는 가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병약한 자녀의 죽음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련들 속에서도 유만주는 일기 쓰기를 통해 시련을 이겨낸다. 특히 자녀의 죽음이라는 비참한 심정 앞에서도 “참 좋은 날이었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일기는, 그의 삶에서 일기 쓰기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일기와 에세이뿐 아니라, 모든 글은 완성된 글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 자체로도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유만주가 그러했듯 때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딛고 또 다른 일상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글쓰기가 우리의 곤경을 완벽하게 해결해줄 순 없지만, 그러한 곤경에서 심리적으로 헤쳐나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만큼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배우 천우희가 자신에게 힘든 일이 닥칠 때면 “내 인생이 점점 버라이어티해지는군. 얼마나 잘되려고 이럴까? 에피소드 하나 더 생긴다고 생각하지 뭐.”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것은 이후 ‘우희적 사고’라는 표현과 함께 다양한 인용과 패러디를 양산하며 SNS상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유만주의 이야기는 ‘우희적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유만주는 글쓰기와 동행하며 삶의 굴곡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간다. 실제로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후, 어떠한 시련을 대할 때에 그것이 ‘나에게 언젠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은 더 확고해졌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에피소드 하나 더 생긴다고 생각’하며 가뿐히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겨나기도 한다.

자칫 국악을 기반으로 한 창작 음악극의 전형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도 있었던 이 작품은, 학계 내부에서만 일부 조명되던 『흠영』이라는 고전을 더 넓은 관객들에게 소개함과 동시에 일기의 의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교과서에서 쉬이 다뤄지는 작품도, 대중적으로 읽혀왔던 소설이나 희곡도 아닌 ‘일기’가 무대에 오른다는 시도 자체가 상당히 흥미롭다. 게다가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서구의 고전과 달리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국의 고전을 재조명한다는 점도 이 작품의 유의미한 성취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일기’를 밑바탕에 둠으로써 일상적인 순간들의 기록 또한 시간의 누적과 함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음악극 <어느 볕 좋은 날> 공연 장면 / 사진. ⓒ국립정동극장
이것은 좋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창작자들의 애정 어린 집념이 빛을 발한 결과이기도 하다. 공연 기간 중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승용 배우는 박예슬 작가의 취미가 ‘논문 읽기’이며, 그 과정에서 『흠영』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 또한 박 작가는 다른 작품의 집필 과정에서 이루어진 유만주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유만주에 대한 연구내용을 일부 인용하기도 했다. 특히 공연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유만주가 양반 가문에서 나고 자랐지만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성과 같은 당대의 주변인들의 시선을 조명하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유만주는 여성들이 성 혹은 별칭으로 불리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글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실명’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는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그의 시선을 이어받아, 변방에 위치했던 유만주의 이야기를 중심에서 함께 나누기에 이른다.

극장에서 고전을 접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히 연극의 경우 ‘희곡’으로 대표되는 고전이 끊임없이 재공연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고전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너무나 관습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데 급급한 공연들도 꽤나 자주 만나게 된다. 동시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적잖이 이루어지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들만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때로는 작품의 내용을 충실히 무대화하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지금, 왜, 굳이 이 작품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는 공연도 적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더 풍성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새로운 고전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은 창작자들의 성실함에 눈길이 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창작자들이 있기에, 고전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관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게 된다. 고전은 이미 ‘검증된’ 만큼 지금에 안주하며 정체되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을 뛰어넘어 고전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금 여기의 관객들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고전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일이 창작만큼, 어쩌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어느 볕 좋은 날>이 일상의 순간들이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고전의 외연을 확장해나갈 창작자들의 애정 어린 성실함이 기대가 된다.

박진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