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아픔을 겪은 가우디는 건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동시에 그는 더 깊은 신앙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고향 선배인 아스토르가의 주교 호안 밥티스타 그라우 이 바예스피노스의 의뢰로 주교관을 짓는 일에도 몰두했다. 극심한 견해 차이로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공사를 포기하고 말았으나 4년여 동안 머나먼 아스토르가까지 오가며 주교관 건설에 매달렸던 건 그라우 주교와의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꼈다. 언제라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40대 초반이던 1894년, 가우디는 목숨을 건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부활절을 앞둔 40일, 즉 사순절 기간에 완전한 단식을 결행한 것이다. 평소에도 그는 사순절 기간은 물론 기도에 열중해야 할 때마다 곡기를 끊는 금식을 하곤 했지만, 40일 금식기도는 처음이었다.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부나 목사 같은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성경에 금식이 처음 언급된 것은 언제일까?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을 때였다. 처음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을 때 모세는 시나이산에 40일 동안 머물렀는데, 음식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40일 동안 금식하며 시나이산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모세는 40일씩 두 번이나 금식을 한 셈이다.
금식기도는 자기 부정과 고행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금식을 선포하고 하느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매달렸다.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한 채 목숨을 걸고 금식기도에 몰입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가우디가 40일 동안 금식기도에 돌입했다는 사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 소식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도 충격적인 뉴스였다. 아버지의 만류와 조카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가우디는 요지부동이었다. 채식주의자였던 가우디는 평상시에도 고기를 먹지 않고, 점심에는 우유에 담근 상춧잎 몇 개만 먹을 정도였기에 건강은 급속히 악화했다. 카탈루냐의 사상가이자 작가였던 호세프 토라스 이 바제스 주교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목숨을 건 금식기도가 자칫 광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행동으로 비쳐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결국 가우디는 바제스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금식기도를 중단했다.
가우디가 왜 위험천만한 40일 금식에 매달렸는지, 그토록 절박하게 기도에 몰두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가우디는 신앙과 예술과 삶이 하나로 융합된 심오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에게 건축은 아름다운 집을 짓는 차원을 넘어 신에게 사람들을 소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훗날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공사에 몰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불구가 된 사람과 같습니다.”
순교자 세 명이 내려다보고 있는 집
비행기를 타거나 드론을 이용해 바르셀로나 신시가지를 촬영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 있다. 모서리가 깎인 사각형 블록 사이로 일정한 높이와 크기를 유지하며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도시의 풍경이 신기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건설된 이 지역을 ‘에이샴플레(Eixample)’라고 부른다.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이곳은 스페인의 도시 계획가이자 토목 기술자였던 일데폰스 세르다 이 수녜르(Ildefons Cerdà i Sunyer, 1815~1876)가 전 생애 동안 설계한 작품이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광범위한 이론과 실무 작업을 수행한 그는 ‘도시화’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현대 도시 계획 분야의 창시자다.
1897년 가우디는 에이샴플레에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페레 마르티르 칼베트 이 카르보넬(Pere Màrtir Calvet i Carbonell, 1843~1894)의 아내 줄리아나 핀토 이 롤도스와 큰아들인 에두아르드 칼베트 이 핀토 그리고 작은아들인 페레가 의뢰인이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저명한 면 제조업자이자 정치인이었다. 이들은 1층에 그들이 소유한 섬유 회사의 점포와 사무실을 두고, 2층을 자택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가우디의 건축물 중 가장 보수적인 건물이라는 카사 칼베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카스프 거리 48번지에 있는 카사 칼베트. 옆 건물과 맞닿아 있어 건축에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발코니, 창문, 지붕 등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른 건물과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 사진. ⓒ 김혜경
카사 칼베트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들이 촘촘히 붙어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기 쉽다. 1층 기둥 위에 붙은 ‘48’이라는 숫자와 출입문 양쪽에 ‘Casa Calvet’라 새겨진 문패를 살펴야 한다. 숫자는 이 집 주소가 카스프 거리 48번지라는 의미다. 가우디는 칼베트가 직물 제조업자라는 데 착안해 1층 출입구 좌우에 실타래 모양의 기둥 두 개를 설치했다. 현관문 앞에서 위를 쳐다보면 사이프러스 나무 조각이 보인다.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환영의 인사다. 그 밑에는 칼베트의 머리글자인 알파벳 ‘C’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카탈루냐 문장이, 아래쪽에는 올리브 나뭇가지가 장식되어 있다.
1층 출입구. 문 양쪽에 실타래 형상의 기둥 두 개가 보인다. 직물 제조업자였던 칼베트의 직업을 나타낸다. 지하 1층 지상 5층에 상업용과 주거용을 모두 갖춘 주상복합건물이다. / 사진. ⓒ 김혜경
현관문 위에는 환영의 상징인 사이프러스가 조각되어 있고 밑에 칼베트의 머리글자인 ‘C’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카탈루냐 문장이 보이고 아래쪽에 올리브 나뭇가지도 보인다. / 사진. ⓒ 김혜경
“아무리 사소한 영역이라 해도, 예술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이란 없다.” 오스트리아가 낳은 상징주의 화가로 빈 분리파 운동의 기수였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남긴 말이다. 마치 가우디를 두고 한 말 같다. 가우디 건축은 은유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만든 집에서 생활하게 될 사람의 편의성과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동시에 의뢰인의 개성과 취향을 충분히 파악해 이를 반영하려고 애썼다. 칼베트 가족이 사는 2층 중앙에 집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돌출 설교단을 설치한 것은 하나의 사례다. 설교단 위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여러 금속 장식이 만들어져 있고, 각종 과일과 칼베트가 좋아한 버섯 그리고 풍요의 상징인 산양의 뿔 두 개가 조각돼 있다.
소유주가 사는 2층 중앙에 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돌출 설교단을 설치했다. 설교단 위에는 각종 과일과 칼베트가 좋아한 버섯 그리고 풍요의 상징인 산양의 뿔이 빚어져 있다. / 사진. ⓒ 김혜경
돌을 쌓아 올린 외관은 견고한 성을 연상시킨다. 몬주익에서 채석한 것이다. 고개를 들어 지붕을 쳐다보면 버섯을 떠올리게 하는 두 개의 둥근 페디먼트가 눈에 띈다. 그 위에는 철제 십자가가 세워졌다. 페디먼트 아래에는 세 개의 흉상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첫 번째 흉상은 순교자인 베로나의 성 베드로에게 바쳐졌다. 예수의 수제자로 초대 교황인 시몬 베드로가 아니라 카탈루냐어로 의뢰인인 두 아들의 아버지 이름과 일치하는 산 페레 마르티르(Sant Pere Màrtir, 1205~1252)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이자 종교 재판관이었다.
나머지 두 흉상은 칼베트의 고향인 카탈루냐 자치구 빌라사르 데 달트의 수호성인인 아를의 성 제네시오와 로마의 성 제네시오에게 바쳐졌다. 아를의 성 제네시오는 공증인으로 303년 또는 308년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통치하에서 순교했다. 아를은 프랑스 프로방스에 있는 도시로 1888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정착해 살면서 약 300점의 그림을 그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의 성 제네시오는 희극배우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조롱하는 연극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때 그는 공연 도중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타올라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 일로 화가 난 황제의 명령으로 그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순교자가 되었다.
건물이 완성된 1900년, 바르셀로나시 의회는 그해 완공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주는 상을 가우디에게 수여했다. 처음 만들어진 건축상이었다. 1878년 레이알 광장 가로등 설치 문제로 불화를 겪은 지 22년 만에 바르셀로나시 의회가 비로소 그의 건축을 인정한 것이다.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 중 무려 일곱 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모두 그의 사후에 지정된 것이다.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상을 받은 건 오직 카사 칼베트뿐이다.
외벽에 붙어 있는 상패. 1900년 바르셀로나시 의회는 카사 칼베트를 제1회 바르셀로나 최우수 건축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것은 가우디가 생전에 받은 유일한 건축상이었다. / 사진. ⓒ 김혜경가우디와의 즐거운 한 끼 식사
카사 칼베트는 개인 소유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1층에 있는 중국 레스토랑 차이나 크라운(China Crown)에 들어가 식사하는 것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로비에 들어서면 양쪽 벽 아래 붙어 있는 소용돌이 모양의 복합 패턴이 새겨진 코발트블루 타일들이 눈에 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도 똑같은 타일들이 장식되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하다. 고흐의 명작 ‘별이 빛나는 밤’이 떠오른다.
그는 이 그림을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인 1889년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서 그렸다. 별이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소용돌이로 표현하며 코발트블루를 주된 색조로 사용했다. 마을 풍경보다 더 크게 묘사된 건 왼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다. 가우디는 고흐를 알고 있었을까? 두 사람은 만난 적 있을까? 같은 시대를 산 불세출의 예술가였으나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데다가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통하는 데가 있었으니 두 사람은 정서적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했던 것 같다.
1층에 자리한 중국 식당 ‘차이나 크라운(China Crown)’. 전통 중국 황실 요리를 기반으로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메뉴를 재구성했다. ‘1899’라는 숫자가 적힌 편액이 눈에 띈다. / 사진. ⓒ 김혜경
1층 내부 통로. 타일에 새긴 푸른 장식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연상된다. 오른쪽 문고리 모양도 흥미롭다. 문을 당길 때마다 아래에 달린 곤충이 그리스 십자가로 변형된다. / 사진. ⓒ 김혜경
잘생긴 스페인 남자의 안내로 자리에 앉자 실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풍이긴 하나 가구나 장식 등이 고전적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취향에 따라 코스 요리와 단품 요리를 고를 수 있다. 전통 중국 황실 요리를 기반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딤섬, 밥, 국수, 생선, 고기, 채소 등을 제공한다. 아내와 나는 밥이 들어간 요리와 해산물 요리 그리고 포도주 한 잔씩을 주문했다. 음식은 괜찮았으나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우디가 만든 집 안에 들어와 밥을 먹게 될 줄이야. 마치 가우디가 앞에 앉아 있는 듯 두근거렸다.
다른 가우디 건축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중국풍의 실내 풍경.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면서 중국 요리를 맛보는 것은 카사 칼베트가 아니면 좀처럼 하기 힘든 색다른 경험이다. / 사진. ⓒ 김혜경
가우디 사진이 걸린 방. 오른쪽에는 그가 만든 원래의 가구가 놓여 있던 방 사진도 보인다. 여기서 식사하면 마치 가우디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사진. ⓒ 김혜경
거주자들이 출입하는 건물 중심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큐폴라를 닮은 모습이 마치 제단처럼 보인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곡선 형태의 벤치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앞에는 나이 많은 입주자를 위해 설계한 스툴이 놓여 있다. 환기 기능을 하는 작은 창문과 고개를 들면 마주하는 웅장한 돔이 인상적이다.
나무로 조각한 작은 예술 작품이 마법처럼 오르내리며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나선형의 돌기둥 사이로 커다란 아치가 세워져 있다. 그 위에는 카탈루냐 국기가 물결치듯 그려져 있고 카탈루냐어로 글자가 적혀 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 성모 마리아’라는 문구다. 국기 가운데는 성 가족의 머리글자 ‘JMJ’가 새겨져 있다. ‘JMJ’는 ‘Jesus(예수), Mary(마리아), Joseph(요셉)’의 약자다.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에 전시 중인 가우디가 만든 가구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가구들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카사 칼베트에는 그가 제작한 가구들이 많았다. / 사진. ⓒ 김혜경
가우디는 1층 사무실과 2층 주거 공간에 사용할 가구와 소품을 직접 디자인했다. 그는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해 기능에 맞는 가구를 만들었다. 가우디와 손발을 맞춘 건 카사스 이 바르데스 공방(Taller Casas i Bardés)의 장인들이다. 그들은 나사나 못을 박지 않은 채 나무를 정교하게 다듬고 조립해서 가구를 완성했다. 가우디의 가구는 목재의 결, 질감, 색상을 돋보이게 하는 추상적 디자인이 특징이다. 직선 하나 없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가구들이다.
가우디는 의뢰인에게 공간만 선물한 게 아니다. 그의 손길이 머문 공간 안에서 흘러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까지도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페레 마르티르 칼베트 이 카르보넬의 아내와 두 아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개성과 취향이 담긴 조각, 장식, 가구, 소품을 보고 사용하면서 그와 함께한 시간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집을 드나들며 주인을 상징하는 흉상과 조상들의 고향을 지키는 수호성인들의 흉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게 될 터이다. 순교자들의 눈길은 미래의 고난과 유혹을 물리치는 힘이 될 수 있다.
가우디가 은유와 해학으로 집을 채운 이유는 공간은 시간이 머무는 곳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비록 가우디는 채식을 즐기고 자주 금식했지만, 그가 만든 집에서 한 끼 식사를 즐기며 영혼의 대화를 나눈다면 건축 여행이 추억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건축의 힘이 아닐까?
지붕 아래 세 순교자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다. 집주인 아버지의 이름과 일치하는 베로나의 성 베드로, 칼베트 가문 고향의 수호성인인 아를의 성 제네시오, 로마의 성 제네시오다. / 사진. ⓒ 김혜경
유승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