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금융위원회 보험개혁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25. 03. 11. 사진=뉴스1
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제도 마련이 사실상 멈춰 섰다. 금융위원회가 지난해부터 수차례 ‘공시 로드맵 발표’를 예고했지만, 기한은 번번이 미뤄졌다. ESG 공시 의무화 시기를 2026년 이후로 연기한 뒤로는 세부 일정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면 일본·중국·싱가포르 등 주요국은 공시 일정과 기준을 속속 내놓으며 제도화를 가속화하고 있어, 국내 기업의 규제 대응 불확실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의 ESG 담당 임원은 “사실상 정부가 손을 놓은 상태로 보인다”며 “국내 제도보다 유럽, 미국 등 해외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미뤄진 약속, 반복되는 ‘로드맵 예고’
정부의 첫 공언은 2023년 5월이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같은 해 3분기 안에 ESG 공시 의무화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계획은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2030년까지 의무 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 부위원장은 국내 기업에 적용될 ESG 공시 기준으로, 초기에는 거래소 공시 체계 아래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된 기후 분야를 중심으로 공시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ESG 공시 정보의 신뢰성 확보를 위해 독립 기관의 검증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검증기관에 대한 규율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몇 달 만에 변경됐다. 같은 해 10월, 김 부위원장은 “ESG 공시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기술혁신의 디딤돌이 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기업경영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며 “국내 ESG 공시 제도를 2026년 이후 의무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약속은 번번이 미뤄졌다. 2024년 12월 재차 김 부위원장은 “2025년 상반기 내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 적용 대상과 일정을 밝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으나, 이후 회의나 공식 일정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는 “한국의 높은 제조업 비중과 수출 의존도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로드맵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2024년 4월 공시 로드맵보다 앞서 한국회계기준원의 주도로 한국형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이 마련된 상황이다.
실종된 추진단, 흐지부지된 논의
2025년 상반기 안에 지속가능성 공시 일정이 발표될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핵심 논의 기구였던 ‘ESG 금융추진단’도 지난해 하반기를 끝으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전문가는 “작년 10월 회의를 끝으로 논의가 끊겼다”며 “회의에서 산업계는 부담을 이유로 연기를 주장했고, 학계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금융위는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ESG 평가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ESG 공시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느낀 적이 없다”며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는 사실상 제도화 논의가 멈춘 상태로 봐야 하며, 결국 국회에서 법제화로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시아 국가 속도전…한국만 ‘눈치 게임’
이런 가운데 아시아 주요국은 이미 ESG 공시 체계를 글로벌 기준에 맞춰 속속 개편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S1·S2 기준을 채택해 2025년부터 시가총액 10억 싱가포르달러(약 1조1000억 원) 이상 비금융 상장사를 대상으로 기후 공시를 의무화한다. 2027년까지는 모든 상장사와 일정 규모 이상의 비상장 대기업으로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는 2024년 2월, 3대 증권거래소와 ESG 공시 지침을 공동 발표하며 2026년부터 지수 편입 기업과 국내외 상장 기업에 ESG 공시의무를 부여하기로 했다. 2030년까지 국가지속가능성 정보공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의무 대상 기업을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일본은 기존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기반 기후 공시를 이미 도입한 상태에서 2025년 3월 ISSB 기준을 반영한 일본 지속가능성 공시기준(SSBJ)을 확정했다. 일본은 2027회계연도(2027년 4월~2028년 3월)부터 시가총액 3조 엔(약 29조 원) 이상 상장 대기업을 시작으로,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의무 공시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2025년 3월 내 확정할 계획이다.
불확실성에 놓인 기업들
이와 관련해 금융위 측은 “해외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국내 여건과 예측 가능성을 고려해 로드맵을 마련 중”이라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목표는 있지만 발표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며 “유럽연합(EU) 옴니버스 패키지, 일본의 대응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더 이상 정부 발표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앞선 ESG 공시 로드맵 논의에 참석했던 한 금융권 관계자는 “올 상반기 안에 로드맵이 나올 가능성도 낮다”며 “정부 내부에서도 실무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최유경 한국법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ESG 공시는 단순한 정보공개를 넘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유도하는 제도적 기반인데, 이 같은 제도화 지연은 산업 전환기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많은 기업이 온실가스 감축, 밸류체인 관리 등 ISSB나 지속가능성회계기준위원회(SASB) 기준에서 강조하는 재무적 이슈에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러한 핵심 주제는 의무사항으로 두고, 나머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은 시장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처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기업에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불확실성을 해소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한 국내 ESG 투자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데드라인을 넘긴 상황이다. 탄핵 정국 속에서 정권이 교체될 경우 ESG 관련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 만약 정권이 바뀐다면 기업의 ESG 대응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