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돈의 관계는 미묘하다. 작품 낙찰가와 연주자의 티켓 파워 등 숫자는 직관적이다. 다만 작가의 정성과 예술혼 등 비물질적인 '성역'도 존재한다. 예술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태를 두고 조각가 김종영은 이렇게 썼다. "세속적 물욕과 공명심에 얽매여서는 생각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함이고, 자유롭지 못한 정신 상태에서 어떻게 남의 심금을 울리는 예술작품이 생겨나겠는가."

약간 발칙한 가설을 세운다. 작가의 작업 방식이나 활동 기간, 예술적 특징이 작가의 '몸값'을 결정하는 변수라면 어떨까. 작가의 창의성이 사실 연령대에 따라 갈린다면 어떨까.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천재와 거장>은 계량경제학의 시선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젊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은 '천재', 경력이 무르익은 황혼기에 꽃피운 '거장'으로 예술가를 분류해 각각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이론, 측정, 확대 적용, 영향…. 인문 예술 교양서를 기대하고 책장을 넘겼다간 1~4장의 제목을 보고 당황할 수 있겠다. 일종의 연구 논문을 방불케 한다. 데이비드 W. 갤런슨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가 썼다. 저자가 학부 시절 우연히 들은 현대미술사 수업이 시작이었다. 작가들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연령과 작품 경매가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이후 근대 미술, 조각, 문학, 영화 등으로 분야를 넓혀 2006년 미국에서 이 책을 냈다.

저자가 '천재'로 꼽는 대표적인 작가는 파블로 피카소다. 피카소의 그림은 철저한 계획의 결과였다. 하나의 작품을 그리기 위한 사전 연구 항목만 400가지. 직전 시대의 서정적 작품들과 전혀 다른 입체파의 서막을 열어젖힌 배경이다. 저자가 집계한 경매시장 자료에 따르면 피카소의 업력은 '아비뇽의 처녀들'이 나온 1907년 정점을 찍는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비슷한 사례로 1960년대 미국 팝아트 작가들이 있다. 이전의 추상표현주의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을 내놓은 주축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었다.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팝아트 작가들의 최고가 작품이 30대 초반에 나왔다. 영화 '시민 케인'을 연출한 오슨 웰스,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도 일찌감치 전성기를 맞았다.
폴 세잔,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1892~1896). 오르셰미술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폴 세잔,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1892~1896). 오르셰미술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이에 비해 폴 세잔은 만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피카소는 보기 드문 천재였지만, 세잔은 천재가 아니었다. 세잔에게 예술은 많은 시간을 들여 힘들게 얻은 능력이었다"고 말했다. 피카소가 사전 계획을 통해 거침없이 그린 것과 달리, 세잔은 본인 작품을 만족스럽게 여긴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작품의 완성을 알리는 작가의 서명이 소수 작품에서만 발견되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세잔은 30대 중반까지 자신의 과제에 대해 어렴풋한 실마리를 간직한 정도였다. 이후 30년 넘게 '기법을 찾겠다'며 떠돌았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역작을 남겼다. 세잔이 67세에 남긴 그림은 26세 때 작품보다 15배 넘는 가치를 보인다. 피카소가 26세에 그린 그림이 67세 때 작품보다 4배 이상 비싼 것과 대조된다. 대기만성형 생애주기는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버지니아 울프, 앨프레드 히치콕의 삶에서도 관찰된다.
<천재와 거장>(데이비드 W.갤런슨 지음, 이준호 강은경 옮김, 글항아리, 440쪽, 2만8000원)
<천재와 거장>(데이비드 W.갤런슨 지음, 이준호 강은경 옮김, 글항아리, 440쪽, 2만8000원)
천재와 거장 사이의 스펙트럼에 놓인 수많은 작가를 하나하나 분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중간에 화풍이 달라진 작가들에 대해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의 생애 전반을 돌아보고 분석을 내린 만큼 이론의 사전 적용이 어렵다는 점도 한계다.

저자는 천재와 거장 사이 우열을 두지 않는다. 단거리 주자와 마라토너를 두고 달리기 시합을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일 테다. 경매시장 자료와 주요 미술 기관 소장품 등록 수, 교과서에 수록된 빈도 등 통계로 예술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참신한 책이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