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반포동 ‘반포자이’. 이 단지엔 강남권에서 처음으로 장기전세주택이 공급됐다. 한경DB
서울 반포동 ‘반포자이’. 이 단지엔 강남권에서 처음으로 장기전세주택이 공급됐다. 한경DB
서울시의 대표적 주거복지 프로그램인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이 도입 12년 만에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는다. SH(서울주택도시공사)가 재정부담 등을 이유로 신규 공급을 대폭 줄이기로 해서다. 장기전세주택은 주변 전세시세의 80% 안팎에 최장 20년 간 집을 빌려주는 임대주택이다. 무주택 중산층이 대상이다. 제도 축소로 중산층 실수요자들이 공공 주거지원의 사각지대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라지는 ‘오세훈 아파트’

5일 서울시와 SH 등에 따르면 서울시 내 장기전세주택의 신규 공급이 큰 폭으로 줄어들 예정이다. 기존 장기전세주택에서 발생하는 공가(空家·빈집)에 대한 입주자모집은 기존대로 진행한다. 다만 새 장기전세의 공급은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기로 가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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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도입된 장기전세주택은 오세훈 전 시장 시절 주요 시정사업으로 추진되면서 ‘오세훈 아파트’로 불렸다. 서울시 산하 SH가 직접 짓거나 재건축 단지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는 대신 늘어나는 집을 일부 매입해 공급했다. 이를 통해 ‘반포자이’와 ‘래미안퍼스티지’ 등 강남 주요 재건축 단지에도 장기전세가 공급됐다.

장기전세주택은 다른 공공주택들과 달리 면적대에 제한이 없다. 이 때문에 대형 주택형을 중심으로 미계약이 많았다. SH는 당초 이 같은 대형 면적대의 공급만 중단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예 장기전세 전체 주택형을 축소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SH 관계자는 “강남권 단지들이나 대형 면적대의 경우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다고 해도 청약 대상자들이 감당하기에 벅차다”며 “정부 시책에 맞춰 청년이나 신혼부부 대상 소형 임대주택으로 전환해 공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정부가 앞으로 신혼부부에게 공급 예정인 공적주택 20만 가구 물량이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게 SH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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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3만 가구 이상 공급된 장기전세의 신규 물량은 이미 지속 감소하는 중이다. 도입 초반만 해도 연간 3000가구 안팎으로 입주자를 받았다. 그러나 2017년 245가구로 감소한 데 이어 지난해엔 31가구 수준으로 줄었다. 올해도 하반기 436가구만 입주자를 받는 것으로 예정됐다. SH공사가 위례신도시(2020년 상반기·685가구)와 고덕강일공공주택지구(2021년 하반기·1722가구)에 직접 짓는 물량이 사실상 마지막이다.

장기전세주택이 줄어드는 대신 행복주택이 늘어난다. 행복주택은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 등에게 공급하는 임대주택이다. 장기전세와 마찬가지로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지만 월세형으로 공급되는 차이가 있다. 관련 근거는 이미 마련됐다. 서울시의 ‘공공주택 건설 및 공급 등에 관한 조례’는 그동안 재건축조합에서 매입한 집을 장기전세로만 공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7년 2월부턴 행복주택으로도 공급할 수 있도록 개정됐다. 서울시는 이를 근거로 아직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지 못한 재건축단지들의 임대용 주택을 행복주택규모(전용면적 60㎡) 이하로 짓도록 유도하고, 매입계약 또한 장기전세가 아닌 행복주택으로 맺기로 했다. 지난해엔 장기전세로 공급 예정이던 565가구가 행복주택으로 전환됐다.

◆누적 손실 9000억원 육박

청년과 신혼부부 지원을 위해 임대 유형을 바꾸는 것이라지만 실상은 결국 SH의 재정부담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행복주택 등 월세형 임대주택은 매월 임대수익이 발생한다. 반면 장기전세의 경우 2년 단위 계약인 데다 인상률도 연 5%로 제한됐다. 사업자인 SH의 현금흐름이 막힐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4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SH가 장기전세주택을 운영하면서 입은 손실은 8813억원이다. 2015~2017년엔 3년 연속으로 손실 2000억원을 넘겼다. 지난해엔 상반기만 925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앞으로 운영하는 동안에도 보증금 수익은 제한된 반면 수선비용과 감가상각비 등 비용은 계속 증가해 임대손실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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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장기전세를 행복주택으로 전환하면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다. 장기전세는 재건축 아파트를 매입하는 경우 전액 서울시 예산을 써야 한다. 하지만 행복주택은 가구당 3000만원가량의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원 대상 면적도 종전 전용 45㎡에서 60㎡까지 확대됐다. 결국 매달 따박따박 현금 수익을 쥐면서 국고보조도 받는 행복주택이 재정적 측면에선 유리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때 ‘혁신적 공공임대 정책’이란 평가를 받았던 장기전세주택의 종말이 예견됐던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유지 및 운영비를 벌 수 없는 구조다 보니 원래부터 지속불가능했다는 지적이다.

전형진/민경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