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감독 "심은경,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가 줬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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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영화계 차세대 거장 미야케 쇼 감독 인터뷰
'여행과 나날'에서 심은경과 호흡
"여행의 즐거움, 극장서 체험해 보길"
"한국영화 위기, 믿을 수 없어"
"창작자보다 구조적 문제가 더 클 것"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말이라는 틀'에 갇힌 각본가인 '이'(심은경)는 자신을 옥죄는 언어, 잘 쓰이지 않는 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고 믿었던 일과 삶에서 무작정 도망치듯 떠난 끝에, 어느 설국의 작은 여관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오래 미뤄둔 감각과 다시 마주한다.
일본 영화계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야케 쇼 감독은 '여행과 나날'에 대해 "이방인이 된다는 건 실패가 아니라 타인과의 첫걸음이라는 것, 그것이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5년에 걸쳐 각본과 연출을 완성한 '여행과 나날'은 "삶의 끝이라고 여겼던 순간에도 다시 시작될 수 있는 나날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는 강조했다.
미야케 쇼는 2010년 장편 데뷔작 '굿 포 낫씽' 이후 꾸준히 자신만의 리듬을 가진 영화를 선보여 왔다. 2012년 '플레이백'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은 연이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이번 영화 '여행과 나날'은 제7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했다. 배우 심은경은 일본, 싱가포르 영화제에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영화는 만화가 쯔게 요시하루의 두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미야케 감독은 "쯔게 요시하루의 만화는 다른 어떤 만화와는 다르다. 한 칸과 한 칸 사이에 많은 놀라움이 숨어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놀라움'의 핵심은 결국 여행이다. "여행은 놀라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들도 여행지에서는 새로워 보이죠. 당연하게 여긴 것을 새롭게 느끼는 순간, 그게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요."
"심은경을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배우로 일본에서도 활동하는 심은경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처럼 뚝 떨어져 온 거죠. 저희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이방인이라고는 했지만 '여행자'라는 시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심은경은 굉장히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
영화 속 이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풍경 속에서 마주한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일상의 무수한 단조로움 속에서도 잊고 지냈던 감각을 일깨운다. 여행의 여정 안에서 엮이는 이야기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
미야케 감독은 "심은경 배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부분을 표현해 주셨다"며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이 내용 너무 잘 알 거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심은경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가 준 것이 아닌가란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심각한 상황에서 유머는 꼭 필요한 것이다. 저희 영화에도 많이 있는데 심은경이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가볍게 연기하면 '풋' 하고 웃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모습이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예상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어요. 캐스팅은 직감입니다. '이 배우가 이 역할을 어떻게 해줄까?'라는 기대감만 있을 뿐이죠. 그런데 결과를 보면 제 직감은 아직까지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최근 한국 영화 산업은 극심한 침체와 구조적 위기 속에 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 영화가 한 편도 초청되지 않은 상황은 업계에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일본 영화는 꾸준히 작품을 내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미야케 감독은 한국 영화의 이같은 상황이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 관객, 미디어, 비평가들을 만나보면 정말 수준이 높아요. 감독님, 배우님들도 포텐셜이 매우 크고요. 그래서 단순히 창작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의 구조적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 영화의 '저력'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답했다. "일본 영화가 국제영화제에 많이 초청된 건 사실이지만, 그게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일본도 영화관 수가 줄고, 관객도 줄고 있습니다. 다만 미니시어터와 아트하우스 상영관들이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다양한 영화를 지켜주고 있고, 그것이 새로운 창작자를 낳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70년 전에는 영화관에 가야만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죠. 지금은 손안에 무한한 영상이 있습니다. 연애 리얼리티 예능을 보면 연애 영화를 만드는 데 라이벌이 된 듯한 기분도 들어요. 실제 전쟁 영상도 접할 수 있는데, 굳이 전쟁 영화를 찍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도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픽션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천 년을 살아간다고 해도 픽션은 계속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영화는 계속 만들어져야 합니다."
미야케 감독은 심은경 이후 한국 배우와의 협업 가능성에 대해 묻자 조심스럽게 웃었다. "사실 하고 싶은 배우는 많지만, 더 큰 기대는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한국 배우를 제가 발견하는 거예요. 그게 더 설레요."
국가 간 합작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는 "물론 단순히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큽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만나는 사람은 제한이 있다. 영화는 집단 예술이고, 서로 다른 국경을 넘어 함께 만든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요."
미야케 감독은 오는 7일까지 타이트한 내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는 "어디서 볼까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영화관에서 꼭 봐주셨으면 한다"며 "'영화를 본다'가 아니라 '체험을 한다'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