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없이 대화도 못 하는 여야 [정치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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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국회의장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권하자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송 원내대표는 한 차례 사진 촬영을 거부했으나, 우 의장이 손을 이끌어 일으켜 세우자 마지못해 뒷짐을 진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이날 회동은 여야 원내대표와 원내수석부대표가 참석한 이른바 '2+2 회동'이었다. 본회의 상정 안건과 비쟁점 법안 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고, 결과는 부분적 합의에 도달했다.
사진 촬영을 둘러싼 짧은 실랑이는 지금 국회가 처한 '단절된 여야'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송 원내대표의 말처럼 최근 여야는 '되는 일도 없는데' 의장실에 모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가 스스로 합의의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이, '국회의장 주재 회동'이 일상화되고 정작 합의에 이르는 힘은 점점 사라지는 구조다.
◇'결정적 순간'에 열리던 의장 회동인데…'상실 회의실' 된 의장실
당초 국회의장 주재 여야 회동은 말 그대로 '결정적인 순간'에만 등장했다. 과거엔 여야가 물밑 협상과 공개 협상을 거듭한 뒤, 사실상 합의에 다다른 뒤에야 의장 주재 회동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패턴이 더 익숙했다.여야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수석부대표 등이 여러 차례 2+2, 3+3 회동을 통해 문구와 숫자를 조정해 놓으면, 마지막에 국회의장이 나서 일정과 표결 방식을 정리하는 식이다. 국회의장실은 '최종 조정 테이블' 혹은 '결정의 방'에 가까웠다.
그만큼 의장 본인에게도 부담이 컸다. 자신이 주재하는 회동이 열리면 '뭐라도 결론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랐다. 그래서 과거 정치권에서는 "의장까지 나섰다"는 말이 곧 '이제 진짜 막판'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국회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여야 간 갈등 강도가 높아지고, 상대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다. 쟁점이 새길 때마다 국회의장이 나서게 되니, 의장실에서 탐색전과 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야 원내대표가 상대 면전에서 공세를 가하는 이례적인 모습이 일상화되기도 했다.
이날도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와 송 원내대표는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다. 김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은 스스로 민생 포기 정당이라는 평가를 듣지 말길 바란다"라며 "오늘 상정 예정이던 안건은 여야가 공감해온 비쟁점 민생법안이다. 이런 법안까지 정치적 공세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송 원내대표도 "상임위에서 추가 논의가 필요한 법안들까지 여당 뜻대로 일방적으로 본회의서 처리하는 것은 숙의의 전당인 국회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회동 이후에도 평행선만 확인하거나, 빈손 회동으로 끝나는 일은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의장 주재 회동의 상징성이 옅어지고 정치적 무게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아예 마주 앉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야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의장에게 중재를 떠넘기는 구조가 고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책임을 지는 주체가 사라지고 여야 회동이 사실상 의장의 독무대가 되어가는 것 아니냐"며 "여야가 직접 합의의 물꼬를 트는 구조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의장실에서 누가 더 강하게 말했는지, 누가 사진 촬영을 거부했는지가 뉴스가 되는 구조 자체가 비정상"이라며 "원래 의장은 최후의 중재자이지 매번 나오는 심판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