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사법개혁, 헌법이 사법부에 준 권한 존중하며 이뤄져야"

"하급심 부실 등 충분한 숙의 필요"
"대법관 증원, 수단이지 목적 아냐"
"사법 독립, 사법부 존립 필요조건"
"재판소원, 반드시 4심제로 간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사진)은 10일 “헌법이 사법부에 부여한 권한을 존중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개혁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여당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사법개혁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이날 오후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이냐시오관 강당에서 ‘법률가의 길: 헌법소원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열고 “권력을 세 갈래로 쪼갠 뒤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자는 게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오랜 숙고 끝에 확립한 제도”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강연은 서강대 멘토링센터장을 맡고 있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대검찰청 감찰부장 출신인 한동수 변호사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대법관 증원 안에 대해 문 전 권한대행은 “충분한 숙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법개혁의 지향점은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돼야 하며, 대법관 증원은 이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한국 대법원이 법률심에 그치지 않고 사실인정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하급심 부실 문제도 짚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사합의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판사를 만났는데, 일주일에 4일을 재판한다더라. 판결문 쓰는 데는 하루밖에 없는 셈”이라며 “심리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짚었다. 또 “2심 법원에서 느꼈던 것이 대법원까지 갈 필요가 없는 사건들에 대해 제기되는 상고 역시 적당한 선에서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상고심 제도를 사실심의 연장을 볼 것인지, 법률심으로 유지할 건지에 대한 큰 틀을 먼저 정하고, 상고가 잦은 이유를 분석한 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순서로 가야 한다”며 “이를 모두 생략한 채, 국회와 대법원 간에 이 주제를 두고 한 차례도 대화하지 않고 대법관 증원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법부에서 우려하고 있는 재판 독립 침해 가능성과 관련, 문 전 권한대행은 “사법 독립은 사법부가 존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라며 “사법부는 사법 독립을 방패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해서도 안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사법부는 더더욱 존립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는 12일, 25일 각각 예정된 전국 법원장 회의와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좋은 의견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사법개혁 일부로 거론됐던 재판소원 도입과 관련해 문 전 권한대행은 “반드시 4심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대법원에 한 해 동안 접수되는 사건이 4만 건이 넘는다. 이 사건 판결에 대해 30% 이상이 불복할 것이고, 일 년에 이미 1만2000건가량의 사건이 접수되는 헌재에서 결정이 나오기까지는 3~4년이 추가로 소요된다”며 권리 구제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재판소원이 활발한 독일에서도 인용률은 1~2%에 그친다”며 “신속한 재판을 위해 대법관을 늘리자면서 (사실상) 4심제로 가자는 건 모순”이라고 강조했다.

재판소원의 대안으로는 헌재가 내린 한정위헌(조문 전체가 아닌, 해석 방식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 결정에 대한 재심이 가능하도록 법률을 개정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발의한 헌재법 개정안의 골자다. 문 전 권한대행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대법원과 헌재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는 사건이 여전히 계류 중”이라며 “당사자만 피해를 보는 구조”라고 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재임 당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심판을 이어가기 위해 심판정족수를 규정한 헌재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 결정을 언급하며 “그 결정이 없었다면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도 불가능했고,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개혁이란 당장 당면하지 않은 미래의 문제를 생각하며 다각도의 연구를 거쳐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선고 당일(4월 4일) 아침 문 전 대행은 “관사에서 헌재까지 가는 길에 불상사가 발생할 가능성이 100만 분의 1도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처음부터 재판관 전원 일치로 파면을 선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치를 없애고 군인을 동원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계엄령은 ‘관용과 자제’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 것이었고,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은 헌법재판관들도 용납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탄핵 결정문에 대해서도 “계엄 사태의 피해자인 국민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써야 한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재판관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며 “6년 재임 기간 그보다 더 공들여 쓴 결정문은 없었다”고 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정부와 국회 간 대립은 일방의 책임이 아니며,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조율되고 해소돼야 할 정치 문제’라는 내용의 문장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면서 “정치 문제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야지, 계엄을 동원할 것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 있어야 파면의 논리가 완성되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정계 진출 가능성에 대해선 "정치할 생각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