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친일파가 지은 '장안의 명물',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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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서울의 근대 문화유산을 소개하다 보면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진 건물들을 희미한 흑백사진으로 볼 때는 더욱 그렇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물은 서촌에 있었던 벽수산장(碧樹山莊)이다.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碧樹山莊)'
벽수산장, 산장이라 하면 산속에 있는 귀신이 사는 집 정도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서촌에 있던 벽수산장은 산속에 박혀있던 것도 아니고,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습한 곳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덕수궁의 석조전만큼이나 공들여 지은 거대한 건물이었다.
벽수산장 누가 지었을까? 그 해답은 벽수(碧樹)라는 말에서 찾아야 한다. 한자로 풀이하면 푸른 나무라는 뜻. 순종이 내린 당호다. 이곳에는 벽수거사(碧樹居士)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 살았다. 윤덕영.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겠다. 그는 경술년 나라가 일제에 빼앗길 때, 주도적 역할을 한 친일 모리배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5대 부의장에 이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다. 이완용이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하고 구워삶아 매국에 이바지했다면, 윤덕영은 왕이 거하는 궁궐의 분위기를 매국으로 몰아갔다.
우리는 매국노 하면 이완용을 1등으로 치지만, 이완용은 아마도 '윤덕영 같은 사람도 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윤덕영의 조부는 조정의 원로 윤용선(1829~1904) 대감이다. 그의 막강한 영향력이 윤덕영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1907년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1876~1935)의 딸이 계비로 간택됐는데 이는 윤용선이 엄황귀비에게 손을 쓴 결과다. 마침내 조카가 황후가 되자 윤덕영은 시종원경이 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윤덕영의 일화가 장안에 파다했다. 윤덕영의 조카 순정효황후(1894~1966)는 병풍 뒤에서 남편의 동태를 살폈다. 순종이 옥새를 꺼내 합방 조약에 도장을 찍으려고 하자, 얼른 순종 손에 있던 옥새를 치마폭에 숨겨 도망갔다. 그런데 복도에서 큰 아버지 윤덕영을 만났다. 윤덕영은 조카의 치마폭을 뒤져 옥새를 빼앗아 순종에게 갖다주어 합방 조약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장안에는 파다한 소문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윤덕영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그러했다.
조카딸 후광으로 순종의 비서실장 격인 시종원경 자리에 오르고, 간동(현 사간동, 경복궁 옆 동네) 97번지에 큰 한옥을 지었다. 간동 옆 박석현이라는 고개 너머가 송현동이다. 박석현은 고개로 늘 질퍽거려 얇은 돌을 깐 고개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안국동으로 지나다 보면 미세한 오르막을 느끼는데 그곳이 박석현이다. 송현동 48, 49번지 알짜배기 땅에는 윤덕영의 동생 윤택영이 살았다. 박석현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 두 형제가 산 것이다.
그러나 윤덕영은 한옥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주재 공사관인 민영찬(1874~1948)이 가져온 프랑스의 일급 귀족들이 사는 집의 설계도면을 양도받아 1910년에 땅을 매입하여 1913년에 착공했다. 프랑스 대저택과 같은 이 집은 1935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돌과 붉은 벽돌로 지었는데, 석재로는 독립주, 건물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해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뤘다. 지하 1층 208평, 지상 1층 222평, 2층은 208평, 3층은 157평 규모 연건평이 800평이나 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몸에 익숙한 한옥을 지어 벽수산장 후면에서 거주했다. 한옥 본채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막상 집을 짓고 나니 그에 대한 여론이 너무도 나빴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좋은 소리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방궁 같은 대저택에 사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서 중국계 신흥종교인 '홍만자회(紅卍字會)' 법당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벽수산장을 중심으로 북쪽 인왕산 자락 아래에는 일양정이라 부르는 한옥으로 지어진 본채가 있었고 동쪽에는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칭하는 소실댁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 조성 시 이축을 계획했으나 부재 훼손이 심하여 한옥마을에는 건물을 신축했다.
현재 소실댁은 새롭게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 그리고 지금 '박노수 가옥'이라 부르는 '김덕현(윤덕영 사위) 가옥'이 남쪽으로 자리해 있었다. 북쪽에는 북각이 동쪽에는 동루가 지어져 있어 높은 위치에서 서울 권역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1만 9천여 평의 부지에는 소나무 단지와 넓은 연못, 능금나무밭이 있었으며 잔디와 마당도 크게 조성되어 있다.
정문은 차량 진입이 가능하며 양 측면은 보행자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문주는 4개였으나 현재 3개가 남아 있어 화려했던 산장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친일파 건물의 허망한 소실이다. 그러나 지금 건물의 기둥과 벽체는 흔적이 되어 답사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