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변주되는 '심청'...눈을 뜬 건 관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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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용호성의 아트 트랙창극의 단골 소재인 <심청>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도 유난히 이야기가 무겁다. 가난한 집안의 외동딸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쳐 희생하는 ‘효’의 서사는 이제 그 공감의 폭마저 그리 넓지 않다. 다행히 이번에 국립창극단이 새롭게 무대에 올린 창극 <심청>은 전통적 메시지를 전복하여 새로운 해석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 연출가 요나 킴은 아버지 심봉사를 넘어서 심청과 관객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국립창극단 '심청' 리뷰
연출가의 시대, 창극의 틀을 깨
억압된 여성의 상징으로 재탄생한 효녀 심청
연출의 힘으로 새로 쓴 결말 인상적
심봉사 아닌 심청과 관객의 눈을 뜨게 한 무대
이미 정해져 있는 음악과 대사를 무대에 올린다는 점에서 창극은 오페라와 닮았다. 작품은 본래 틀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오페라 무대는 이 틀을 해체하며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왔다. 오페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작곡가와 성악가 중심의 예술로 여겨져 왔지만, 시각적 연출과 스토리텔링의 힘이 전면으로 부각되면서 이른바 ‘연출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고전 오페라를 단순히 재현하는 대신 연출가의 해석과 시각을 덧입혀 동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흐름에 대해 유럽 무대에서는 ‘레지오퍼(Regieoper)’라 지칭하였다. 레지오퍼는 무대 이미지나 영상 장치 등을 활용한 파격적 연출을 통해 동일한 서사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꾸준히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라이온킹>의 감독이었던 줄리 테이머는 2004년 메트의 신작 <마술피리>에서 가면이나 퍼펫 같은 동화적 도구를 오페라 언어로 형상화하면서 시각 연출의 존재감을 관객들에게 새롭게 각인시켰다. 또한 연극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는 <니벨룽의 반지>에 24개 패널로 구성된 거대한 모듈러 세트를 도입하여 무대 기계 자체를 드라마의 축으로 삼으면서 오페라의 표현 지평을 넓혔다. 이들의 작업은 익숙한 결말의 오페라 작품으로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였다. 그 결과 연출이 주도하여 구성하는 무대는 더 이상 음악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작품 해석의 전면으로 이동했다. 연출가의 상상력이 음악과 대등하게 무대를 지배하며 작품을 새롭게 규정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심청>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인당수 장면에서 요나 킴은 대규모 영상과 파도 소리에 더하여 군무와 합창이 어우러지는 스펙터클한 무대 연출을 통해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 미학은 심청이 ‘죽음으로 효를 완성’하는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심봉사를 비롯하여 심청을 둘러싼 온갖 군상들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통해 그 희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무대 위의 극은 끝나지만 심청은 무대 뒤로 퇴장하지 않는다. 무대를 넘고 객석을 지나 극장 밖의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심청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영상은 심청이 더 이상 희생의 굴레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눈을 뜨며 새로운 삶을 향해 가는 주체적 결단을 상징한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의 퇴장을 연상시킨다. 19세기의 노라는 가정을 지탱하는 ‘인형’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지만, 21세기의 심청은 ‘효녀’의 틀을 넘어 주체적 존재로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간다.
이번 작품에서 눈을 뜬 건 심봉사가 아닌 심청이었다. 그리고 관객이었다. 효와 희생의 전형을 넘어 눈을 뜬 주체로서의 심청을 재발견한 연출가의 시도는 전통에 대한 관객의 눈도 새롭게 뜰 수 있게 해주었다. 이번 무대는 전통이 과거의 그림자로 머물지 않고 현재의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자유롭게 변주되며 그 힘을 유지해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한국 전통 공연이 질적으로 변화하고 양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 하나를 제시해주었다.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요나 킴의 이러한 시도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판소리 다섯 마당 전체를 아우르는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졌으면 하는 점이다.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 <수궁가> 등 각 작품마다 덧입혀질 해석이 꽤나 흥미진진할 것 같다. 이러한 작업은 국립창극단이 전통의 재해석을 넘어서 세계무대와 함께 호흡하며 동시대를 대표하는 공연작품의 하나로 창극을 확장시켜갈 수 있는 계기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용호성 문화예술평론가·前 문체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