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한이었다면 정주영 없었다…韓, 성공한 자본주의의 상징" [영상]

제임스 로빈슨 단독 인터뷰

"한국이 발전한 역사는 매우 성공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재벌 등에게 경제적 집중이 있었지만 일시적이었습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19일 세계경제학자대회가 열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이 이뤄낸 성장이 '재벌' 중심의 '착취적 성장'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큰 그림을 보면 긍정적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느 국가에나 경제적 집중이 있다"며 "이것은 규모의 경제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이뤄진 이후 한국의 성장이 가속화됐다는 점"이라며 "착취적 성장이었다면 이런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성장의 배경에 한국의 포용적(inclusive) 제도가 있었다고 짚었다. 로빈슨 교수는 "사회적 이동성과 기업가정신을 높이는 데 포용적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북한이었다면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가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용적 제도란 더 많은 사람을 경제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혁신과 창의성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이익이 특정 권력집단에 집중되지 않고 노력 여하에 따라 다양한 사람이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정 집단이 경제활동 참여를 제한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착취적 제도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로빈슨 교수는 이런 포용적 제도가 국가의 경제발전의 근본적인 요인이라는 점을 밝혀내 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작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좁은 회랑> 등 아제모을루 교수와 공저한 책으로 유명하다.

로빈슨 교수는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경쟁에 대해서도 "혁신하고 실험할 자유가 있는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로빈슨 교수와의 일문일답.

▶제도가 포용적인지 착취적인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포용적인 제도는 광범위한 기회와 인센티브를 창출하는 제도입니다. 착취적 제도는 그 반대이죠. 법치주의가 대표적인 포용적 제도의 사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이 적용되는 '법 앞의 평등'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봐야합니다. 반대로 법치가 없는 북한 같은 곳은 착취적 제도에 해당합니다. 경제적으로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지, 정치적으로는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는지 등 다양한 기준을 갖고 통계적 분석을 통해 포괄적으로 평가합니다."

▶한국과 북한의 경제적 격차에 대해 언제 관심을 가지게 됐나요?
"1993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동아시아의 기적' 보고서를 읽었을 때일 겁니다.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 저는 수학적 경제학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비교 발전에 관심이 있었지만 어떻게 연구해야할지 몰랐거든요. 박사과정을 마치고 호주 맬버른대에 강사로 일할 때 '한번 사는 인생인데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도구와 방법론을 관심있는 분야에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그 무렵 이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제적 기적을 얘기해주는 보고서입니다. '왜 이런 엄청난 격차가 발생했을까요?' 19세기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사회과학 비교 연구 방법론을 적용해 두개의 유사한 사례를 선택하고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한 거죠. 한국은 이런 방법론에 아주 잘 맞는 사례였습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을 어떤 계기로 읽게 됐습니까?
"누가 추천해서는 아니고, 그냥 제가 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저는 가능한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한국의 발전 경험은 기업가정신, 역동적인 기업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을 움직였는가'가 궁금했습니다. 저는 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연구했는데, 한국의 가장 큰 두가지 수수께끼는 '어떻게 이렇게 정책을 잘 실행하는가', '경제발전에 집착하는 지도자는 어떻게 나오는가' 입니다.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야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고,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자서전을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어로 나온 자서전이 많이 없어요.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도 읽고 싶은데 영어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 회장의 스토리를 '놀라운 사회 이동성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 국민들은 사회의 이동성이 크게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적어도 데이터를 보면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면서 불평등이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경우엔 엄청난 불평등 증가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 사회적 이동성이 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경제가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정 회장의 자서전을 보면 1970년대 한국은 훨씬 단순한 사회였고,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해관계가 형성돼 있고 경제가 복잡해졌기 때문에 1970년대처럼 개방적이고 이동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큰 그림에 주목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15세 딸은 한국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K팝과 K뷰티에 열광합니다. 그런 문화적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15세 소녀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열광하는 소녀는 있죠. 이는 사회의 창의성과 에너지 덕분입니다. 물론 도전 과제도 있겠지만 이런 큰 그림을 봐야합니다."

▶정 회장의 이야기는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포용적 제도가 기업가정신을 만든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사회적 이동성이 기업가정신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 회장이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일각에서는 한국의 성장모델을 '착취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재벌을 중심으로 경제적 이익과 특권이 집중됐다는 것이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이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착취적 성장'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특정 기업이 할 일을 지시했죠. 박 대통령은 정 회장에게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조선소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경제적 집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은 포용적인 정치체제로 이행하면서 성장이 가속화했다는 점입니다. 재벌들은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했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자본주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부정부패, 경제적 집중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큰 그림을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크게 악화하지 않았지만 주택가격 급등으로 자산불평등이 확대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자산불평등이 포용적 제도를 구축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요?
"자산불평등에 대한 데이터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산불평등은 측정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세계은행의 소득불평등 데이터입니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주택 가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한국 인구가 감소하면서 가격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농촌 마을처럼요."
▶인공지능(AI)의 발전이 세계경제 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보십니까
"AI는 확실히 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를 봤습니다. 20명의 서로다른 직업의 사람들이 AI를 자신의 직업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리사 같은 일상적인 직업의 사람들도 AI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현재 노동인구의 약 4분의 1이 AI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료분야에선 특히 엄청난 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가슴통증으로 병원에 간 환자에게 심장마비가 올지 의사보다 AI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연구에 AI를 활용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연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정치적 이념이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같은 유명한 정치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논쟁하고 행동했는지를 분석하는 식입니다. 이를 위해선 많은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분석해야합니다. AI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콜롬비아에선 정부가 무장단체 지도자들과 인터뷰한 테이프를 디지털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너무 많은 작업량 때문에 불가능했던 연구를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

▶AI의 발전도 포용적 제도에서 더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잭 마(마윈)을 생각해봅시다. 그가 정부를 비판하니까 사라졌습니다. 소련, 스탈린 시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경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중국은 소련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은 일부 분야에서 혁신적이었죠. 로켓이나 탱크 등을 개발했지만 성공적인 경제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AI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이 AI 분야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혁신하고 실험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AI 발전에 놀라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공은 일시적일 것으로 보십니까?
"소련은 일부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매우 좁은 영역에서만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전기차 등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고 민간부문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지만 마윈 같은 인물이 정부의 압박을 받는 것을 보면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창의성과 혁신에 근본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AI 발전이 당면 과제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한국의 AI 산업은 조금 뒤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보조금 지급 등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구체적인 것은 기업과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AI 발전 모델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AI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아마 미국인보다 더 많은 중국인이 AI를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한국도 한국만의 모델을 개발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삼성이나 LG의 CEO에게 물어봐야겠지만요."

▶한국의 경제 시스템에 잠재적인 위험이 있다고 보시나요?
"성공만 보이고 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를 간적이 있는데 주변 번화가를 걷다보니 한국 음식점, 화장품이 많아서 한국 경제가 번영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 피부과 의사도 한국 선크림을 쓰라고 합니다. 물론 1970~1980년대에 비해 성장률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성장률이 둔화되기 때문입니다."

강진규/임다연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