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된 역사를 ‘안전지대’로 옮긴 ‘사회적 추상’

마크 브래드포드 개인전 'Keep Walking'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내년 1월 25일까지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흔히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떠올리면 구상 회화를 떠올린다. 도시의 풍경이나 인물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현실을 고발하고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현대미술이 이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됐을까. 미국의 화가 마크 브래드퍼드(64)가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조적 폭력, 인종차별, 성 정체성 같은 21세기 뜨거운 이슈를 화폭에 담으면서도, 이를 추상의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사회적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재현 대신 해체하고, 고발하는 대신 은유하는 그의 작업은 캔버스에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공통된 사회적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사회적 추상’이 의미 있는 건 단지 고정관념을 전복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브래드퍼드의 회화는 종종 잭슨 폴록 등 ‘뉴욕스쿨’의 추상표현주의 계보에 놓이지만, 내용은 더 폭발적이다. 그가 바깥에서 출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 중심의 백인, 남성, 엘리트 미학 중심의 단선적인 주류 미술사에서 지워진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의 서사를 끌어올렸다. 일상적인 재료를 층층이 덧대고, 긁고, 찢어내는 방식으로 구축한 추상적 화면은 잊힌 역사의 증언인 셈이다. 2021년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그를 선정한 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그는 왜 미술사에 맞선 투쟁을 벌이고 있을까. 서울 한강로2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브래드퍼드: Keep Walking’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브래드퍼드가 20여년간 걸어온 예술적 여정과 추상으로 역사를 새기는 그의 작업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시 개막에 앞서 지난달 28일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작가는 이런 실마리를 던졌다. “제 작업을 ‘사회적 기억’이라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 기억을 마치 정치인처럼 무겁게 말하는 대신 예술가답게 놀면서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서울의 풍경을 담은 ‘누운 회화’

전시에선 회화와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의 작품이 관객과 만난다.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반호프 미술관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 순회전이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담겼다는 게 작가와 미술관의 공통된 설명이다. 브래드퍼드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로 선보이는 기획전이란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등 한국에는 몇 차례 온 경험이 있지만 개인 전시를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크 브래드포드 'Blue', 2005.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장에 들어서면 처음 마주하는 2019년 작 ‘떠오르다’다. 캔버스 천과 종이, 실을 손수 찢어 만든 수백 개의 띠가 전시장 바닥을 뒤덮은 설치 회화로, 관람객이 작품을 직접 걷도록 유도한다. 회화는 벽에 걸려 있고, 관람객은 바라봐야 한다는 예술 경험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틀었다. 베를린 전시와 작품의 색채가 달라진 점이 눈길을 끈다. 기존 작품보다 강렬한 형광 색깔들이 눈에 띈다. 작가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에 더했기 때문이다.

‘엔드페이퍼’ 연작은 브래드퍼드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작품이다. 미국 로스앤젤러스(LA)에서 태어나 자란 브래드퍼드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서 일하다 30대가 돼서야 비로소 예술을 접했다. 미용실에서 파마 시술 시 사용하는 반투명한 종이인 앤드페이퍼를 작업에 활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토치로 가장자리를 그을려 검은 테두리를 만든 뒤 겹겹이 캔버스에 부착해 격자 구조를 형성하는 이 작품은 회화의 물성을 실험적으로 확장한 추상작품이다. 그는 “이 종이는 내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를 연결시키는 재료”라며 흑인 공동체의 문화적 맥락이 고스란히 담긴 미용실에서의 시간은 브래드퍼드 예술세계의 근간이라고 강조했다.
마크 브래드포드 '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전시 하이라이트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연작이다.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보며 통제 불가능한 재난과 미숙한 정부의 피해 복구 과정에서 드러난 소외된 삶에 주목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외된 인간 군상을 미국 최초의 드래그 퀸으로 알려진 인물이자 사회적 탄압을 받았던 윌리엄 도어시 스완의 삶을 병치시켜 표현했다. 브래드퍼드는 “정치적 불확실성 같은 구조적 폭력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인간성을 잃지 않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필요하다”며 “그런 마음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마크 브래드퍼드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심층 인터뷰는 이달 말 발간되는 아르떼매거진 16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