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법 '株권' 외칠 때, 미국 회사법은 '社익' 살폈다

DEEP INSIGHT

美와 반대로 가는 韓 '상법 개정안'

'기업 유치' 열올리는 텍사스·델라웨어州
텍사스州, 이사·임원 소송 요건 강화하고
'중대과실 위반'만으로는 임원 처벌 못해
잇단 주주보호 판결에 흔들리는 델라웨어州
기업 이탈 막으려 지배주주 거래 규정 등 완화

'소수주주 보호 강화'에 방점 찍은 한국
국가 차원 회사법만 갖춰 기업 탈출구 없는데
이사 충실의무 확대 추진…재량권까지 해쳐
글로벌 기준과 동떨어진 집중투표제 밀어붙여
더불어민주당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재발의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텍사스주와 델라웨어주가 기업 친화적 방향으로 회사법을 경쟁적으로 개정하는 정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뉴저지 회사법이 미국 내 친기업 회사법 체계의 대세였지만, 델라웨어의 노력으로 주류가 바뀌었고 최근엔 텍사스가 기업 친화적 정책을 반영한 법체계로 기업 유치 경쟁에 가세했다. 반면 한국은 국가 차원의 단일 회사법 체계를 갖고 있어 기업들에 ‘탈출구’가 없다. 이런 근본적 차이 때문에 한국에서 상법 개정을 추진할 때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텍사스, 델라웨어에 도전장

연방이 아니라 주(州)가 회사법을 관할하는 미국에선 수십 년 전부터 기업 유치를 위해 주 간 회사법 경쟁을 벌여왔다. 이 경쟁 구도에서 델라웨어주는 기업 친화적인 판례법과 유연한 기업 환경을 앞세워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S&P500 기업의 약 64%가 델라웨어에 등록·설립돼 있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델라웨어 법원이 소수주주 보호에 중점을 둔 판결들을 내리면서 기업의 불만이 커지자 텍사스주가 이런 틈새를 공략했다. 텍사스는 델라웨어보다 더 기업 친화적인 회사법을 제정해 기업 이전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텍사스 의회는 이달 7일 ‘상원법안 29호(SB 29)’를 통과시켰으며, 그레그 애벗 주지사가 14일 서명함으로써 즉시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안은 텍사스를 ‘기업 설립 선호 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의 일환이다.

텍사스 법안의 핵심은 ‘경영판단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의 성문화다. 이 원칙은 텍사스 기업의 이사와 임원은 △선의로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 이익을 위해 △법과 회사 규정을 준수하며 행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이사와 임원에 대한 소송 제기 요건을 대폭 강화해 불필요한 소송을 막는 역할을 할 전망이다.

특히 텍사스 상원법안 29호는 회사 임원으로 보호 범위를 확대하고, 델라웨어와 달리 ‘중대한 과실’만으로는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지 않도록 했다. 또 주주대표소송도 상장기업은 3% 이상 지분을 확보해야 가능하도록 했다.

델라웨어 ‘기업 이탈’ 조짐에 회사법 개정

미국 회사법의 중심지 델라웨어도 지난 3월 25일 회사법 체계에 중대한 변화를 줬다. 델라웨어 의회는 소수주주 보호와 기업 경쟁력 사이에서 후자에 무게를 둔 회사법 개정을 단행했다.

‘상원법안 21호(SB 21)’로 불리는 이 개정안의 핵심은 지배주주 관련 거래에 적용되는 ‘세이프 하버(Safe Harbor)’ 규정 신설이었다.

개정법은 상장폐지(Going Private) 거래를 제외한 일반적인 지배주주 거래에서는 ‘독립 위원회 과반수 승인’ 또는 ‘소수주주 과반수 동의’ 중 하나만 충족해도 경영판단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법원이 이사의 결정을 심사할 때 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도록 해 경영진 책임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델라웨어 대법원은 지난해 4월 ‘매치그룹 사건’에서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런 엄격한 기준을 입법을 통해 완화한 것이다.

개정법은 또 주주의 회사 정보 열람권에 제한을 두고, 이메일이나 개인적 통신 내용을 열람 대상에서 제외했다. 아울러 이사의 독립성 판단 기준과 ‘지배주주’의 정의를 명확히 해 법적 분쟁 소지도 줄였다.

델라웨어가 기업 친화적으로 선회한 배경에는 ‘기업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델라웨어 대법원의 매치그룹 판결 이후 테슬라, 드롭박스 등 주요 기업이 텍사스, 네바다 등 규제가 덜한 주로 본사 이전을 추진하는 현상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韓,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초점

국내 입법 흐름은 이와 반대다. 이소영 민주당 의원은 4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전체 주주의 이익을 추가’하는 원포인트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윤준병 의원도 같은 날 이사 충실의무 확대와 함께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회 위원 분리선임, 전자주주총회 활성화 등이 포함된 더 광범위한 상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은 이외에 자사주 소각 제도화와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도 추진하고 있다. 김정연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이사회 구성권의 본질적 성격에 반하는 측면이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제도”라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텍사스·델라웨어와 한국의 상반된 움직임은 각국 법체계 차이에서 비롯한다. 법무부 법무실장을 지낸 구상엽 변호사는 “미국은 주 간 경쟁으로 기업 친화적 방향으로 돌아선 반면 한국은 단일 회사법 체계에서 주주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델라웨어와 텍사스의 법 개정은 이사회와 지배주주에게 더 넓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인수합병(M&A) 거래 유연성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라며 “한국에서도 상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이사 충실의무 확대와 동시에 경영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