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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수능 논술, 선한 의도라도…
AI시대 사고력평가 중요하지만
되레 사교육 경쟁만 부추길 수도
대학 입시, 1점차로 당락 갈리는데
한 달 내 수십만명 답안 채점
객관성·공정성 확보도 쉽지 않아
설익은 개편으로 지옥문 열 건가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되레 사교육 경쟁만 부추길 수도
대학 입시, 1점차로 당락 갈리는데
한 달 내 수십만명 답안 채점
객관성·공정성 확보도 쉽지 않아
설익은 개편으로 지옥문 열 건가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사지선다형 시험만으로 학생의 사고력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오래됐다. 더욱이 인공지능(AI)이 지식을 찾아주고 답까지 생성해주는 시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문제를 해석하고 자신의 판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다. 평가가 바뀌어야 수업도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의도로 시작한 입시 정책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사례는 많지 않다. 1990년대 중반 과도한 경쟁을 줄이겠다며 도입한 고교 내신 절대평가는 성적 부풀리기 논란 끝에 2005년 상대평가로 바뀌었다. 수능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늘린 학생부 중심 수시 역시 공정성 논란 끝에 주요 대학의 정시 확대로 이어졌다. 문제를 해결하려 제도를 바꾸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과거 제도로 회귀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시행착오에는 공통점이 있다. 제도 변화가 가져올 파장과 이해관계자의 반응을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론 반발이 커지면 정책을 수정하거나 철회했다. 교육의 미래보다 당장의 여론을 잠재우기에 급급했던 셈이다.
미국 교육학자 캐럴 와이스는 정책을 설계하고 평가할 때 그 영향을 받는 다양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s)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 입시는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학생과 학부모, 학교와 대학, 사교육 시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다기한 생태계다. 하나를 바꾸면 모두가 움직인다.
수능에 서·논술형이 도입되면 가장 먼저 움직일 곳은 사교육 시장일 것이다. 사고력과 글쓰기 교육을 내세운 상품이 쏟아지고 초등학생은 물론 유아기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논술 마케팅이 등장할 것이다. 세 살에 시작하는 ‘독서 고시’가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 자녀가 어릴수록 부모의 불안은 커질 것이다. 사고력을 기르려는 정책이 오히려 사교육 경쟁을 앞당기고 가계 부담을 키울 수 있다. 지역 간 교육 격차도 확대할 우려가 있다.
공정성은 더 어려운 문제다. 서·논술형 평가에서 채점자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학문적으로 허용 가능한 채점 오차라고 해도 단 1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입시에서 수험생과 학부모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십만 명의 답안을 제한된 시간에 채점하려면 정교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채점 기준이 촘촘할수록 다양한 사고를 인정하기 어렵고, 여러 답을 허용할수록 채점의 일관성은 흔들린다. 사고력을 제대로 측정해야 하는 ‘타당도’와 50만 명 이상이 응시하는 고부담시험(high-stakes test)에서 확보해야 할 ‘신뢰도’ 사이의 딜레마다.
AI 채점도 만능은 아니다. 인간 채점자와 판단이 다르면 누구의 점수를 따를 것인가. 재채점 결과가 달라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채점 근거는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가. AI가 채점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도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별개 문제다. 공정성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채점 논란은 제도의 지속성마저 위협할 수 있다.
국교위는 정권과 여론에 흔들리지 않는 교육의 백년대계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됐다. 교육부와 별도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능 서·논술형 도입을 둘러싼 논쟁에서 설익은 개편 방향을 제시하고 예정된 발표마저 미루면서 장기적 비전을 세우기보다 여론 눈치를 보는 모양새다. 제도 변화의 파장과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내놓는 빈약한 해법이 국교위 전문성과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다.
교육 제도는 한 번 바꾸면 한 세대가 그 결과를 감당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서양 속담처럼 선한 의도만 믿고 입시 제도를 밀어붙이는 우(愚)를 더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