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텍사스 등 공화 텃밭 장악
경합주 싹쓸이…상·하원 압승
치솟는 생활비에 트럼프 '심판'
생활비와 기름값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란전쟁과 관세전쟁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쌓인 유권자의 분노가 3일(현지시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미국 언론에선 ‘블루 웨이브’(민주당 돌풍)를 넘어 ‘블루 쓰나미’라는 평가가 잇달았다.
AP통신에 따르면 4일 오전 4시30분 기준 민주당은 상·하원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상원에서는 최소 54석, 하원에서는 최소 228석을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적인 대외 정책과 이민 정책이 남은 임기 2년간 의회 및 지방 권력을 민주당에 헌납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민주당으로 표가 쏠리며 이변이 속출했다. 공화당 텃밭으로 경합지에 포함되지도 않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45세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의 거물 현역 의원을 꺾었다. 텍사스에서는 제임스 탈라리코 민주당 후보(37)가 약 55%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 아이오와, 오하이오, 캔자스 등 주요 경합지에서도 민주당의 승리 선언이 이어졌다.
전체 435석인 하원에서 민주당이 250석 이상을 가져가며 압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의석(민주 214석)에서 40석가량을 추가한다는 의미다. 20석 정도만 더 가져와도 ‘역사적 대승’이 될 것이라던 미국 매체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송원석 한인유권자연대 사무총장은 “유권자들이 지지 정당보다 현재 주머니 사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라고 했다.
민주당이 하원을 탈환하면서 내년 초 흑인 최초 하원의장 자리를 예약한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오늘 밤 승리한 것은 미국”이라며 “위대한 미국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 인플루언서 로라 루머는 X(옛 트위터)에 “미국은 끝났다”고 적었다.
트럼프의 공화당 왜 참패했나…3대 요인 분석 전쟁으로 인한 고물가에 무대책…트럼프 일가·관료 부패에 반발
민주당 지도부도 놀란 선거 결과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심판론이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어냈다. 민주당조차 이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 지역에서 접전이 벌어진 것은 물론 승리한 사례가 잇달았다. 2년 전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젊은 층과 히스패닉, 흑인 등 유색인종이 등을 돌리면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블록이 완전히 붕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화, 먹고사는 문제 외면”
높은 투표율 자체가 ‘블루 쓰나미’(민주당 압승)의 전조였다. 플로리다의 미국선거연구소가 집계한 사전투표 인원은 6200만 명에 달했다. 4년 전 중간선거 때보다 35% 이상 늘어난 수치다.
3일(현지시간) 현장투표 열기도 뜨거웠다. 2년 전 대표 경합지로 꼽힌 펜실베이니아주 워링턴 벅스카운티 투표소에서 만난 폴 트레모(63)는 기자에게 “올해는 특히 투표율이 높다”고 귀띔했다. 높은 투표율은 젊은 층 등 통상 낮은 투표율을 나타내는 유권자군이 적극 참여했다는 의미로 해석돼 민주당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저녁 무렵 투표가 순차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발표된 출구 여론조사 결과는 어김없이 공화당의 패배를 가리켰다. 여론조사업체 SSRS가 시행한 유권자 대상 출구조사에서 응답자 39%는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제’를 꼽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의 우세를 예측한 전망은 개표가 본격화하자 더 강해졌다. 상원의원 선거에서 경합지로 분류되지 않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민주당에 넘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당초 상원에서 50 대 50 혹은 51 대 49의 치열한 경합을 예상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민주당은 54석 이상을 확보했다.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차지한 것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전으로 고전한 2006년 이후 처음이다.
◇물가와 부패 문제 등에 발목
트럼프 대통령 심판론이 민주당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분노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이란전쟁과 관세전쟁에 따른 물가 상승, 트럼프 대통령 일가를 비롯한 주요 관료의 부패 혐의, 강압적인 이민 정책 등이다.
지난 9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3.7%(전년 동기 대비)를 기록했다. 에너지 가격이 20.4% 급등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경제성장률 지표가 좋고 소비지출도 증가세지만, 유류비 상승으로 인한 ‘강제 지출’은 인기 없는 이란전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을 자극했다.
아울러 시민은 생활비 문제로 고전하는데 트럼프 대통령 일가와 대통령과 가까운 이들의 자산이 암호화폐, 인공지능(AI) 투자 등으로 계속 불어나는 상황이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 강력한 이민자 단속과 백인 중심 정책은 2년 전 트럼프 대통령의 우군이 된 유색인종과의 선거 연합이 깨지는 계기가 됐다.
특히 히스패닉 유권자의 마음이 식은 것이 공화당에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찍은 히스패닉 유권자에게 ‘자신을 MAGA 공화당원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폴리티코·PF글로벌 여론조사) ‘그렇다’고 답한 비중은 작년 말 56%에서 최근 37%로 줄었다.
트럼프 정부는 투표소에서 무자격 유권자를 걸러내겠다는 이유로 이민자를 단속하거나 투표를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법원에서 제동이 걸리자 투표 당일 법무부 차원에서 감시관 1000명을 주요 투표소에 배치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전국을 돌며 수십 차례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적극 지지를 호소한 트럼프 대통령이 받은 타격은 더 크다. 공화당에선 ‘트럼프 시대의 종말’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