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게 겁이 나는 것도 있어요."

작은 카페에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는 간밤의 꿈을 들려주고, 누군가는 오래전 기억을 꺼낸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탐색하고, 오래된 연인은 헤어질 말을 고른다. 김종관 감독의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그들의 말과 표정에 잠시 머무는 영화다.

손가락 하나로 영상을 넘기고 긴 이야기는 배속으로 소비하는 시대, 김 감독도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했다.

"숏츠와 릴스를 많이 보고, AI로도 영상이 많이 만들어지잖아요. 도파민에 많은 사람이 절여져 있어서, 10년 전 '더 테이블'을 만들 때보다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바람이 있다면 그 반대의 사람도 있을 거라는 거예요. 거기서 느끼는 어떤 결핍을 이 영화에서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4일 개봉한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동안 한 카페를 거쳐 간 인물들의 네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김민하와 주종혁, 한선화와 장률, 심은경과 이희준, 전소영과 김동휘가 서로 다른 온도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러닝타임은 80분, 촬영 기간은 11일이다.

"굉장히 심플한 영화이고, 작고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런 것을 만드는 일 자체는 작고 사소하지 않아요. 그걸 하기 위해 고된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상부터 개봉까지는 4~5년이 걸렸다. 2021년 팬데믹을 거치며 대본을 썼고,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을 추진했다. "그만큼 제 인생이 있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나의 인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배는 띄워졌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어요."
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출발점에는 '더 테이블'이 있었다. 플로리스트 작업실을 카페로 꾸미고, 하나의 테이블에서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을 7일간 촬영했다. 매일 다른 배우를 만나 대화를 찍는 과정이 즐거웠다.

"어느 날 나가면 한예리 배우가 앉아 있고, 다음에는 임수정 배우가 앉아 있는 거예요. 그곳이 무대가 되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제 영화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물려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업을 한 번 더 해보고 싶었죠."

신작의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은 그의 소신에 힘을 보탰다. "이런 작업 자체도 충분히 의미 있다는 걸 믿고 있고, 세상에 설득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계속 만들다 보면 '얘는 이것밖에 못 하네' 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꾸준히 하면 '이 사람은 여기에 진짜 관심이 있구나'라는 반응을 이끌고 싶어요. 개막작 선정은 그런 호응처럼 느껴졌어요."

이번에는 카페 안에서도 자리와 시간, 장르의 분위기를 달리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고도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은 인상을 받는 소설집처럼, 각자의 색을 지니면서 하나로 남기를 바랐다.

네 이야기를 잇는 생각은 '양면'이다. 같은 공간을 바꾸는 낮과 밤, 현실을 바탕으로 꾸는 꿈, 경험에 상상을 보태는 창작이 맞물린다. "현실 없는 꿈은 없잖아요. 닮아 있으면서 다른 거예요. 혜진은 전혀 무관한 카페 직원과 사장을 멜로로 엮기도 하죠. 상미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망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신념일 수 있어요. 마지막 연인들이 매달리는 미래도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전혀 모르는 세계고요."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첫 번째 '한여름 밤의 꿈'에서 시계를 다루는 현오에게는 감독의 시선을 담았다.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며 의미를 찾는 인물이다. "일반적인 서사구조보다는 찰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전과 후를 가늠하면서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현오가 전체 이야기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었으면 했죠."

현오 역의 주종혁에게서는 낮의 건강한 활기를, 유진 역의 김민하에게서는 밤의 편안한 호흡을 발견했다. 특히 김민하는 자신이 쓴 문장을 살아 있게 만드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어법이 마음에 들어요. 대사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해요. 김동휘 배우도 그렇고요. 누구와 말하느냐에 따라 화법도 달라지잖아요. 김민하 배우와 문혜인 배우가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편하게 이야기하는 호흡이 밤의 무드와 잘 맞았어요."

유진과 현오가 잠시 스칠 때는 냄새로 상대의 존재를 느끼게 했다. 냄새에 민감하고, 냄새로 기억하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설정이다.

대사의 큰 흐름은 유지하되 인물의 세부는 배우에게 맡겼다. 적은 예산 안에서 현장과 배우에게 자신도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배우를 지시하는 문장을 많이 넣지 않아요. 해석력과 분석력,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면 믿고 가는 거죠. 배우가 대본을 읽는 걸 들으면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여덟 배우가 참여한 데는 기존 작업을 통해 쌓인 신뢰도 있었다. 큰 개런티를 보장할 수 없는 만큼 연기하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배우들도 창작자이고 아티스트잖아요. 연극을 하는 것도 수익보다는 도전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이 작업에서 그런 도전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2~3회차만 나와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그만큼의 수고만 드는 건 아니에요. 서로 만들어가는 작업이니까요."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가장 많은 리허설을 거친 '아직 나인 사람들'에서는 한선화가 '95%의 액션'을 맡고 장률이 리액션으로 장면을 이끈다. "영민 역의 장률 배우의 연기가 너무 어려워요. 계속 받는 안에서 만들어야 하잖아요. 표정도 똑같이 할 수 없고요. 혼자 열심히 떠드는 사람을 누가 표현할까 하는 고민과, 그걸 받아줄 사람에 대한 고민이 같이 있었어요."

'술꾼도시여자들'에서 한선화의 강렬한 연기를 보고 상미를 떠올렸다. 다만 시나리오를 건네기까지는 감독의 내향적인 성격도 작용했다.

"제가 심한 내향인이라 거절당하는 게 싫어요. 한선화 배우가 제 영화에 호의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드려도 되겠구나 싶었죠." 상미를 하나의 해석으로 닫고 싶지는 않았다. 영민 역시 그의 말을 믿는 것과 별개로 내면에 변화가 생겨야 했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심은경과 이희준의 '이.순.불'은 양쪽 모두 공격수다. 웹소설 작가 혜진과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려는 독립영화감독 동남이 충돌한다. 헛소리처럼 들리다가도 뒤늦게 곱씹게 되는 코미디를 원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침범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불호가 생기는데, 어느 순간 '이 사람에게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면서 극복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이해가 생기면 이야기 안에 녹여보려고 해요."

두 인물에게는 자신의 일부도 넣었다. 자신감과 욕망이 넘치는 혜진, 첫인상부터 꺼려질 수 있는 동남의 매력을 심은경과 이희준이 표현해주리라 믿었다.

"비호감의 면모가 있는 사람들끼리 충돌하는 거예요. 제 생각이나 일부를 넣으면 인물도 더 이해할 수 있고, 저 자신도 객관적인 거리에서 볼 수 있잖아요. 전체가 농담이면서도 그 안에 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컷
마지막 '가을 이야기'에는 전소영과 김동휘를 세웠다. 아이돌 데뷔를 꿈꾸는 나경과 요리를 택한 종수는 다른 미래를 향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등 좋아했던 고전의 정서를 젊은 배우들의 얼굴로 표현하고 싶었다.

"여전히 헤어짐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잘 다루고 싶었어요. 나경은 훨씬 불확실한 쪽으로 가는 사람이에요. 아직 보이지 않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향해 가보고 싶은 사람이죠."

인물들이 머무는 카페도 주인공이었다. 구석에서 남을 관찰하는 작가의 자리와 사적인 대화를 위한 테이블 간격까지 고려했다. 서동욱 작가의 회화는 한 장면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장치다. "관객은 편하게 느꼈으면 했지만 은근히 조직적인 구성도 했어요. 이 영화는 이야기이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책과 영화, 자신의 생활에서 재료를 얻는 김 감독은 창작을 '거짓말로 만든 일기장'에 비유했다. 다큐멘터리와 책, 뮤직비디오도 그 일기장의 일부다. 세븐틴 원우와 민규의 '비터스윗'에서는 세트에 익숙한 아이돌을 실제 장소로 데려와 찍었다.

"툴에 갇히지 않고 여러 창작을 해보고 싶어요. 뮤지션들은 저와 다른 삶을 살지만 그분들도 창작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 삶을 엿보면서 종수와 나경 같은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종관 감독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새로운 형식을 반기면서도 사실적인 이미지 자체에 감동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AI 시대에 그가 떠올린 것은 연극이었다.

"무대에는 가짜 가로등과 가짜 카페가 있죠. 난방이 잘되는 곳에서 배우들은 추운 연기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날씨를 체감하고 이야기에 몰입하잖아요. 감정에 울고 웃으면서 눈앞의 사람들을 실감하는 거예요."

자신의 영화가 호불호가 분명한 영역으로 향한다는 사실도 안다. 다만 이 속도를 원하는 관객은 만나고 싶었다. "호불호의 세계로 가고 있기는 해요. 그런데 '호'가 있으면 돼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돼요. 창작은 다른 삶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나와 닮은 것을 찾고 연결감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그는 '더 테이블'이 누군가의 추억으로 살아 있듯 신작도 오래 남기를 원했다. "10년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서 회자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어요.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김종관은 한순간을 오래 바라본다. 카페에서 타인의 말을 듣는 80분이 누군가에게는 10년 뒤에도 꺼내볼 기억이 될 수 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