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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으론 모자라"…연상호 감독이 '실낙원' 예산 늘린 사연 [씬터뷰]
연상호 감독, 저예산 신작 '실낙원' 공개
김현주·배현성 호흡 속 인간 심연 파고든다
"새로운 영혼 만들기 위해 새 몸 필요"
"영화 보고 토론하는 것, 실존에 대한 사색"
김현주·배현성 호흡 속 인간 심연 파고든다
"새로운 영혼 만들기 위해 새 몸 필요"
"영화 보고 토론하는 것, 실존에 대한 사색"
14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은 이번 작품을 두고 "인간의 심연과 상실을 정면으로 다룬 깊이 있는 심리 스릴러"라고 설명했다. 거대한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무대로 삼은 그의 행보는 여전히 날카롭다.
'얼굴'에 이은 저예산 퐁당퐁당 프로젝트…"새로운 영혼을 위한 새로운 몸"
특히 지난해 선보인 '얼굴'에 이어 이번 '실낙원'까지 저예산 영화를 연이어 선보이는 만큼 어떤 노하우가 생겼을지 궁금해졌다. 이에 연 감독은 "특별한 노하우는 따로 없고, '얼굴' 때는 러프하게 해보자 하고 시작했다"며 웃어 보였다. 이어 "영화가 잘 되다 보니 파티도 하고 행복해했는데, 막상 정산을 하니 빈틈이 보이더라. 그 빈틈에 대한 부분은 보너스를 추가로 마련했다"고 떠올렸다.
예산 규모가 2억 원에서 5억 원으로 늘어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에 하면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컸다"며 "막내 스태프까지 정당하게 지분을 나눌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재정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2억 원으로는 모자라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흥행 성적에 대한 기대감을 묻자 그는 담담하면서도 현실적인 속내를 내비쳤다. "'얼굴'만큼 잘된다는 생각은 안 한다"면서도 "너무 다행인 것은 해외 판매분이 있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손익분기점에 대해 묻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웃어넘겼지만, 이번 작품 역시 해외 시장에서의 반응을 기대케 했다.
저예산 작업을 향한 그의 시선은 철저히 '직업인'으로서의 태도에 닿아 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영혼의 결핍을 느끼고, 새로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처럼, '실낙원'은 연상호 감독이 정형화된 시스템을 깨고 스스로를 가장 치열한 결핍 속으로 밀어 넣은 결과물이다.
어머니의 3페이지 원안에서 출발한 '실낙원', 그리고 실존주의의 질문
이 충격적인 서사의 시작은 놀랍게도 감독의 어머니가 건넨 3페이지짜리 연습장에서 비롯됐다. 명절에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건넨 원안은 한 마을의 모자가 겪는 비극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궁금해하며 여러 생각을 해봤다"는 그는 대학 시절 예술대 학들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두고 실존주의적 토론을 벌이던 기억을 꺼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거창하게 실존주의를 토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었을까,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것 자체가 실존에 대한 사색"이라는 설명이다.
영화의 제목은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착안했다. 뱀의 몸을 빌려 이브를 유혹했던 '질투'라는 감정에 포커스를 맞췄다는 그는, 9년 만에 돌아온 아들 선우를 뱀에 빗대어 해석했다. 납치범의 손에서 자라며 자신을 규정지어 버린 정체성이, 소영이 건네는 "넌 내 아들이야"라는 말 한마디로 균열을 겪는 과정을 그렸다.
'실낙원'은 AI 프로그램이라는 첨단 기술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 기술을 찬양하거나 디스토피아를 경고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AI 선우는 인간처럼 사색하는 존재가 아니라, 소영의 반응에 기계적으로 응답하는 리액션의 집약체일 뿐이다.
연 감독은 "설명하는 순간 인간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며 "류소영의 마지막 선택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 될지라도 감정적으로는 깊이 공감되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장르 영화의 미덕에 대한 소신도 확고했다. "아주 어려운 질문을 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장르 영화의 본질"이라며 "예술영화의 하위 매체로 구분하는 시선도 있지만, 대중적인 방식을 통해 누구나 쉽게 영화를 보고 각자의 사색을 나누게 만드는 것이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대학시절 라디오헤드의 팬이었다고 밝힌 연상호 감독은 "얼터너티브에 푹 빠져있었다. '오케이 컴퓨터(OK Computer)' 명반이다. 너무 멋있지 않냐. 그때 당시에 라디오헤드가 가장 싫어하는 곡이 '크립(Creep)'이었다. 한동안 그 곡만 공연을 안했을 정도다. 저도 팬이다 보니 후진 음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고 돌아 '크립' 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시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방식이 쉽다고 쉬운 질문을 던지는건 아닌것 같다. 아주 대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게 제 생각이다. 쉬운 방식 때문에 재미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라고 설명했다.
페르소나 김현주와 새로운 얼굴 배현성이 빚어낸 시너지
신예 배현성의 발탁 과정도 흥미롭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시즌 2에서 짧은 특별출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첫 영화 주연을 맡았다. 연 감독은 "돌아보니 제 영화에 젊은 남배우가 드물더라. 박정민, 최우식 정도다. 순수한 면과 서늘한 면을 동시에 품은 마미야(일본 영화 '큐어' 속 캐릭터) 같은 불쾌함과 알 수 없음의 미학을 배현성이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반도'에서 호흡을 맞췄던 구교환이 이번 작품에도 카메오로 의리 출격해 재미를 더한다. 심각한 촬영 현장에 직접 의상을 챙겨와 조심스럽게 임했다는 후문을 전했다. 영화에서 구교환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말에 "그걸 흥행 포인트로 밀고 있다"며 "잘 찾아봐 달라"고 귀띔했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나 영원히 이상향을 그리워하듯, 연상호 감독은 매 작품 새로운 지옥과 낙원의 경계를 넘나들며 질문을 던져왔다. 다작의 원동력을 묻자 그는 "서로 다른 형식의 작업들이 거대한 휴식이자 재충전이 된다"며 미소 지었다.
일본에서 제작된 '가스인간' 프로젝트를 비롯해 끝없이 확장되는 '실낙원 유니버스'까지, 그의 카메라는 멈출 줄 모른다. 다만 이번 가을, 관객들이 마주할 '실낙원'은 그 어떤 대작보다 서늘하고 매혹적인 심리적 수렁이 될 전망이다.
'실낙원'은 오는 21일 개봉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