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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얼굴' 잇는 저예산 도전작 '실낙원'…"동아리 활동처럼 만들어"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류소영에게 사망한 줄 알았던 아들 류선우가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심리 스릴러다.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2일 서울 용산구 CGV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얼굴' 언론시사회에서 연상호 감독은 이번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평소 글을 써내려가는 게 만만치 않다고 토로하자, 글쓰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글만 알면 자기 이야기 있으면 쓰는 거야"라고 격려했다고 떠올렸다. 그 말을 믿은 모친이 다음 명절에 직접 연습장 몇 장에 걸쳐 글을 적어 건넸던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연 감독의 모친이 남긴 초안은 총 세 편 분량이었다. 그는 "그중에 내가 한 편만 샀고, 나머지 두 편도 재밌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샀다"며 "뭔가 기묘한 정서가 마음을 끌더라"고 회상했다. 특히 악행을 저지른 자식과 그를 품에 안으려는 어머니의 복잡미묘한 감정선이 마지막 세 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대목이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악한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리, 마지막 선택이 세 페이지에 걸쳐서 있는데 심리가 기묘했고, 심리가 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심리를 탐구해 보자"는 마음으로 곧바로 각본 작업에 착수하게 됐다는 전언이다.
이후 해당 원안은 총 세 차례의 각색 과정을 거쳤다. 첫 번째 버전은 '펑크'라는 가제로 다듬어졌고, 두 번째 버전은 소설 '블랙 인페르노'로 출간됐으며, 마지막 세 번째 버전이 이번 영화 '실낙원'의 시나리오로 결실을 맺었다.
아울러 연 감독은 "작년에 '얼굴'이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서 그것에 대한 용기로 '실낙원'을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좋은 동료들과 즐겁게 촬영한 기억밖에 없고, 그런 작품으로 관객과 호흡할 생각을 하니 무척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얼굴'도 그렇지만 '실낙원'도 산업적인 목적을 갖지 않고 친한 사람들끼리 동아리 활동처럼 만들었다"라며 "늘 그럴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작업이 즐거워서 1년에 한 번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류소영은 '낙원의 아이들'이라는 명칭의 AI 프로그램을 통해 10세 시절에 멈춰 선 가상의 아들과 교감하며 상처를 치유하려 든다. 인공지능이라는 소재를 택한 배경에 대해 연 감독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팽창하는 시대 속에서 과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규정하는지 골몰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사는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정조준해보고 싶었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최근 대두되는 생성형 AI 활용론에 관해서도 소신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는 AI 작업에 대해 "AI는 보편성의 집합이라는 느낌"이라며 "AI 작업이 예술이 되냐는 질문은 보편성이 독창성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과 같은 느낌"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제가 서양학과를 전공했는데, 공장에서 찍어 낸 상품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논쟁이 현대 미술사에 거론된 적이 있다. 뒤샹이 변기를 '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다다이즘으로 연결됐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생성형 AI도 충분히 독창성으로 연결할 수 있는 예술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서 인간다움은 사색에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사색으로 인해 많은 일이 발생하며 그것이 곧 인간다움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이어 "그냥 제가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는 거지 문제점은 없었다. 다만 류소영의 심리를 따라가는 게 전부이다 보니 진정성을 가지고 연기를 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촬영 현장에 대해서는 "만약 촬영 기간이 길었다면 즐겁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정신적으로 피해가 있었을 것 같다. 워낙 촬영 시간이 짧았어서 몰입해서 집중도 있게 촬영을 마쳤다"고 덧붙였다.
9년 만에 의문의 생존자로 돌아온 류선우 역의 배현성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서늘한 미스터리를 절제된 톤으로 소화해 냈다.
연상호 감독은 두 배우의 시너지를 조율하며 혈연이라는 가장 밀접한 관계 내부에 도사린 균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전작이 부자 관계의 비밀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모자 관계의 파국을 통해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가감 없이 추적한다.
'실낙원'은 오는 21일 개봉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