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공격을 받아 식품을 모두 내린 벨기에 브뤼셀 인근의 보르트메르베이크 델하이즈 슈퍼마켓 냉장고. / AFP 연합뉴스
2일(현지시간) 공격을 받아 식품을 모두 내린 벨기에 브뤼셀 인근의 보르트메르베이크 델하이즈 슈퍼마켓 냉장고. / AFP 연합뉴스
유럽에서 슈퍼마켓 냉장고와 냉동고를 겨냥한 사이버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 해커들이 원격으로 냉각 설비를 조작하면서 일부 매장에서는 온도 설정이 섭씨 50도로 바뀌었다. 한 매장은 우리 돈으로 약 1억5000만원어치 식품을 폐기했다고 밝혔다.

3일 AP·로이터통신과 BBC 등 다수의 외신에 따르면 최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스웨덴, 아일랜드,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유럽 7개국에서 식료품 유통업체의 냉장·냉동 설비가 공격받았다. 지난달 프랑스 슈퍼마켓 수백 곳에서 발생한 냉각 설비 해킹과 비슷한 피해가 다른 국가에서도 보고된 것이다.

벨기에 유통업체 델하이즈는 지난 1일 밤부터 2일 새벽 사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약 40개 매장에서 냉장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일부 매장에서는 냉장·냉동고 온도가 15도까지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새벽에 경고를 받은 관리자와 직원들은 식품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장으로 출근했다. 냉장 트럭을 동원해 상품을 옮긴 곳도 있었다.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한 델하이즈 매장은 약 10만유로(약 1억5000만원) 상당의 식품을 폐기했다며 영업 중단에 따른 손실은 별도라고 설명했다.

까르푸도 벨기에 매장 15곳이 영향을 받았지만 긴급 조치로 영업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스파 매장을 운영하는 콜루이트그룹은 가맹점 5곳이 공격받았다고 전했다. 벨기에 몽스에 있는 이케아 매장 내 식당도 냉장 설비 이상으로 일부 식품을 예방적 차원에서 폐기하기로 했다.

스웨덴 남부 셰보의 ICA 매장은 SNS에 밤사이 해킹으로 냉장고와 냉동고 온도가 50도로 설정됐다고 알렸다. 해당 매장은 한때 문을 닫았다가 영업을 재개했다. 또 다른 유통업체 쿱은 전체 800개 매장 가운데 7곳이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아일랜드에서는 슈퍼밸류 매장 13곳이, 네덜란드에서는 정육점과 소형 식품점 등 최소 17개 업체가 영향을 받았다. 핀란드 K그룹 계열 일부 매장과 에스토니아 셀버 슈퍼마켓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공격자는 냉장·냉동 설비를 성에 제거 기능인 '제상 모드'로 강제 전환한 것으로 파악됐다. 식품을 차갑게 유지해야 할 장비가 오히려 내부 온도를 높이도록 조작된 것이다.

피해 설비 일부를 공급한 벨기에 업체 사브코벨은 영향을 받은 장비를 네트워크에서 분리했다고 밝혔다. 스테판 묄란스 최고경영자(CEO)는 프랑스에서 공격이 발생한 뒤 취약점을 보완해 왔지만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뿐 아니라 장비를 물리적으로 개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의 상당수 슈퍼마켓은 냉장·냉동 설비를 인터넷에 연결해 원격으로 유지·보수하고 있다. 이런 연결망이 공격 통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벨기에 검찰과 스웨덴 사이버보안 당국 등은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공격 배후와 국가별 피해 사이의 연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한센 유럽연합(EU) 농업·식량 담당 집행위원은 이번 공격을 식량 공급을 방해하고 소비자 신뢰를 훼손하려는 의도적 시도로 규정했다. 다만 현재 식량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라면서도 식품 폐기와 기업 피해는 실질적인 문제라고 우려했다.

김연지 한경닷컴 기자 kong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