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에 미미 역으로 출연하는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에 미미 역으로 출연하는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악보를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소프라노 박혜상은 오페라 '라 보엠' 악보를 펼쳤다. 처음 맡는 미미 역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새롭게 발견한 순간을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그는 4막에서 미미가 로돌포에게 마지막 사랑을 전하는 '모두 갔나요?'를 짚었다. 선율을 직접 부르다가 강세를 달리해 다시 노래했다. 인터뷰는 어느새 악보를 사이에 둔 작은 음악 수업이 됐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바다처럼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만 하고 가겠다는 거예요. 음이 하나씩 내려오다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 다시 확장되죠."

박혜상은 다음달 5~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에서 미미로 데뷔한다. 엄숙정이 연출하고 김광현이 지휘하는 이번 공연에서 그의 출연일은 6일과 8일이다.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을 누벼온 그에게도 이번 배역은 각별하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맞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이제야 무대에서 만나게 됐다.

"그동안 안 맞는 옷을 정말 오랫동안 억지로 껴입고 있었던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성공을 위해 열심히 해왔다면, 이번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처음 맡는 역할이라 떨리지만 그 안에 편안함도 있어요."
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에 미미 역으로 데뷔하는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에 미미 역으로 데뷔하는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 음대 재학 시절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노래하기도 했던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며 더 가볍고 기교적인 배역을 주로 맡았다. 앞선 인터뷰에서는 아시아 성악가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에 맞지 않는 역할을 소화하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날은 그 과정에서 겪은 혼란을 더 구체적으로 털어놨다.

국내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맡았지만, 해외에서 주어지는 배역은 달랐다."줄리어드나 메트에서 주는 역할이 늘 불편했어요. 그런데 제가 못하면 그 사람들이 맞고 제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죠. 제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거예요."

세계적인 교육기관과 극장의 판단 앞에서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배역에 목소리를 맞추려 애쓰며 생긴 긴장을 풀어내는 데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음역이 전환되는 구간인 '파사지오'부터 다시 공부했다. 발성을 돌아보고 재정비한 시간이 "5~6년은 된 것 같다"고 했다.

미미는 그렇게 되찾아온 박혜상 본연의 목소리로 만나는 인물이다. 준비의 출발점은 악보였다. 그는 다시 오페라 '라 보엠'의 악보를 펴고 페이지를 넘겼다. 비슷한 선율이 반복돼도 푸치니가 적어놓은 빠르기와 늘임의 위치는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봄까지 이별을 미루자는 연인들의 말이 어디서 머뭇거리고 어디서 흘러가는지, 그 작은 차이를 따라가며 인물의 마음을 읽었다.

"길게 쓰지 않았는데도 가수가 길게 부르면서 관습이 된 부분이 있어요. 제가 뭔가 미미처럼 하려고 하기보다 푸치니가 적어놓은 것을 정확하게 알고 부르면 음악 자체가 달라지더라고요. 공부하는 맛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오페라 '라 보엠' 에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상대역으로 '미미'를 노래한 전설적인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의 녹음도 거듭 들었다. 과거 프레니에게 성악을 배웠던 남편의 조언이 계기였다.

최근 결혼한 미국인 남편은 바리톤 출신의 사업가다. 그의 음악을 세밀하게 듣고 조언하는 ‘귀명창’이다. 박혜상은 자신의 발성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도 남편의 도움이 컸다며 "귀가 정말 좋다. 그렇다보니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프레니의 녹음을 거의 1초 단위로 끊어 들었어요. 누군가의 노래를 그렇게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었어요. 어느 음을 짧게 하고 길게 하는지, 소리를 어떻게 연결하는지까지 들었죠."

악보에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을 붉은색으로 작게 표시했다. 모방에 가까울 만큼 집중해 들었지만, 실제로 부르면 결국 자신의 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원하는 소리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면 다시 녹음으로 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음악을 치밀하게 준비한 만큼 무대에서는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첫 미미인 만큼 연출에 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기보다 제작진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한다고 했다. 로돌포 역의 테너 이원종과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호흡을 맞추고 있다.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경제신문 아르떼와 인터뷰중인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경제신문 아르떼와 인터뷰중인 소프라노 박혜상 /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번 무대는 오랜 인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자리이기도 하다. 박혜상은 서울대에 입학한 2007년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디 빅5' 시리즈에 합창단원으로 참여했다. 연습실과 지하 대기실을 오가던 새내기 대학생이 19년 만에 미미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세종문화회관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박혜상이 다음으로 마음에 품은 역할은 베르디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다. 당장 맡겠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인물이 만날 때를 기다리겠다는 이야기다. "미미도 10년 전부터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맞는 때를 찾다가 지금 그 순간이 온 거죠. 데스데모나도 그런 느낌이에요."

성악가로서 라이벌이 누구냐는 마지막 질문에는 "뻔한 대답이지만 저 자신"이라고 답했다. "머릿속에서 노래하길 희망하는 소리와 실제로 연습과 공연에서 나오는 소리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가장 치열한 경쟁이자 과제"라고 덧붙였다.

"발성에 너무 집중해도, 연출에 너무 집중해도 원하는 소리를 잃어버릴 때가 있어요. 결국 관객의 귀에 어떻게 들리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가장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소리를 내기 위해 혼자 치열하게 싸워요. 그래서 저 스스로가 라이벌이에요."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