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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조강국 독일은 왜 다시 스타트업을 이야기하는가
김정민 PwC컨설팅 전무
현지에서 확인한 해법은 ‘연결의 밀도’였다. 기술을 고객과 연결하고, 첫 계약을 후속 투자로 이어주는 구조다. 개별 기업과 연구기관의 경쟁력보다 이들을 하나의 생태계로 묶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BMW의 스타트업 협력 조직인 ‘스타트업 거라지’가 대표적이다. 로버트 하인 글로벌 리더는 BMW의 연간 연구개발비가 약 83억 달러인 데 비해 세계 벤처투자 규모는 5000억 달러를 웃돈다고 밝혔다. 성격이 다른 두 수치를 비교한 이유는 분명했다. “BMW보다 더 큰 연구소가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BMW는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하기보다 이미 문제를 해결한 스타트업을 찾는다. BMW i벤처스가 투자를 담당한다면 스타트업 거라지는 현업의 문제를 해결할 기업을 발굴한다. 2015년 이후 6000개 넘는 스타트업을 검토하고 280건 이상의 실증사업을 진행했다. 이 가운데 38개의 솔루션이 현장에 적용됐다.
핵심은 ‘자본보다 고객이 먼저’라는 원칙이다. 스타트업은 BMW라는 첫 고객을 확보하고, BMW는 외부의 혁신 기술을 빠르게 도입한다. 첫 계약은 스타트업이 후속 투자를 받고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는 발판이 된다.
뮌헨공과대(TUM) 기반 창업지원기관 운터네머툼(UnternehmerTUM)도 마찬가지다. BMW 대주주 가문의 수잔 클라텐이 지원하는 이곳은 연구자에게 창업가와 경영자를 연결한다. 기술이 제품으로 발전하면 BMW·지멘스·SAP·에어버스 등 기업 고객을 붙인다. 시제품 제작부터 사업화, 투자 유치까지 단계별 지원 체계도 갖췄다.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가치 100억달러 이상의 셀로니스와 유럽 모빌리티 플랫폼 플릭스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우주발사체 기업 이자르 에어로스페이스, 양자컴퓨팅 기업 IQM 등도 이곳 출신이다.
독일의 초기 투자기관 HTGF는 자본으로 이 연결을 뒷받침한다. 정부와 산업계 등이 참여한 HTGF는 20여 년간 800개 이상의 기술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200건 넘는 투자금 회수를 기록했다.
인상적인 것은 “모든 것이 거대언어모델(LLM)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독일은 생성형 AI 열풍 속에서도 산업 AI와 에너지, 우주·양자기술, 바이오 등 장기 성장동력에 투자한다. 감자 가공 공장을 개조한 스타트업 집적 공간 베르크1(WERK1)에서는 기업과 투자자, 창업가의 만남이 일상이다. 해외 창업가를 위한 주거 공간까지 마련했다. 이곳에서 본 것은 대학과 기업, 자본과 공간이 하나의 시스템처럼 움직이는 ‘벤처 넥서스’였다. BMW가 문제를 제시하고, 운터네머툼이 기술·인재를 연결하며, HTGF가 자본을 공급한다.
한국에도 세계적 제조기업과 대학, 창업가와 자본이 있다. 부족한 것은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일 수 있다. 기술 검증이 첫 구매로, 첫 구매가 후속 투자로 이어지는 성장 경로를 구축해야 한다. 다음 데카콘(기업가치 100억달러 이상)은 기술이 아니라 연결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