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이 키스 해링의 작품을 재해석한 ‘카퓌신 BB 홀리데이’(왼쪽)와 ‘카퓌신 미니 댄서스’.  루이 비통 제공
루이 비통이 키스 해링의 작품을 재해석한 ‘카퓌신 BB 홀리데이’(왼쪽)와 ‘카퓌신 미니 댄서스’. 루이 비통 제공
우르스 피셔, 알렉스 이스라엘, 키스 해링. 활동 시대도 작품 세계도 각각 다른 이 세 명의 현대미술가를 연결하는 것이 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의 핸드백 ‘카퓌신’이다. 루이 비통은 2019년부터 현대미술 작가들이 이 카퓌신 가방을 저마다의 작품 세계로 재해석하는 ‘아티카퓌신’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일상에서 작품을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지난 25일 막을 내린 세계적인 현대미술 행사 ‘아트바젤 파리’에서는 프로젝트의 7년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열렸다. 파리 그랑팔레의 귀빈 발코니에 14명의 예술가가 디자인한 가방과 영감을 준 원작을 나란히 선보였다. 피셔의 과일 작품 옆에는 바나나 장식을 단 가방이, 이스라엘의 서핑보드 지느러미를 형상화한 회화 옆에는 같은 형태의 장식이 솟은 가방이 놓였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해링과 협업한 여덟 번째 컬렉션이다. 해링의 그림을 13개 디자인으로 재해석했다. 이 컬렉션은 이번 전시에서 먼저 공개됐다.

거리의 예술, 가방 위에 새롭게 태어나다

키스 해링의 자유의여신상 그림을 1만 개 이상 크리스털로 구현한 ‘누들박스 뉴욕 시티’.  루이 비통 제공
키스 해링의 자유의여신상 그림을 1만 개 이상 크리스털로 구현한 ‘누들박스 뉴욕 시티’. 루이 비통 제공
해링과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은 의외의 연이 있다. 1984년 미국 뉴욕에서 해링은 1930년대 제작된 루이 비통 여행가방에 자신의 대표작 ‘래디언트 베이비’를 그려 넣은 적이 있다. 친구의 오래된 가방에 낙서하듯 남긴 이 그림은 수십 년이 흐른 2020년 경매에 등장했다. 당시 루이 비통은 이 작품을 약 3만5000달러에 사들였다. 그리고 브랜드 아카이브에 보관하던 이 가방을 올해 5월 뉴욕 패션쇼 무대에 올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루이 비통과 해링은 40여 년 전 이미 한 차례 협업한 셈이다.

이번 공식 협업에서 루이 비통은 유명 화가의 그림을 단순히 가방에 옮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컬렉션을 예술 작품 그 자체로 구현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길거리 화가에서 시작해 갤러리 안팎을 넘나든 해링 작품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수백 시간 동안 장인의 수작업을 거친 뒤에도 각종 복잡한 첨단 제작 기술을 투입했다. 해링이 직접 그림을 그린 옛 여행가방에서 출발한 제품 ‘카퓌신 MM 제네시스’가 대표적이다. 현대의 기술로 오래된 갈색 가죽의 색감과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했다.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게티이미지 제공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게티이미지 제공
‘카퓌신 나노 러닝 하트’는 1984년 작품 ‘러닝 하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은색 금속으로 만든 가방에 1만2000개가 넘는 크리스털을 1주일 넘게 일일이 붙였다. ‘카퓌신 이스트-웨스트 미니 메이즈’는 해링의 1984년 회화 ‘무제(프란체스카 알리노비를 위한 회화)’에 등장하는 미로 같은 선을 수천 개의 비즈와 실로 일일이 표현했다. 바느질과 코바늘뜨기를 결합한 자수 작업에만 약 240시간이 소요됐다. 어린이와 어른 누구나 색칠할 수 있도록 만든 해링의 컬러링북도 가방이 됐다. ‘미노디에르 카퓌신 펫츠’는 책에 등장하는 강아지를 흰색 레진 소재로 구현한 제품이다. ‘누들박스 뉴욕 시티’는 뉴욕의 테이크아웃 음식 포장 용기를 본뜬 가방에 해링의 자유의여신상과 사과 그림을 입혔다. 표면에는 1만 개 이상의 크리스털을 붙였다.

가방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

해링의 그림을 가죽으로 재현한 ‘카퓌신’ 제작 과정. 루이 비통 제공
‘미노디에르 카퓌신 나노 러닝 하트’에 크리스털을 장식하는 모습.  루이 비통 제공
해링의 그림을 가죽으로 재현한 ‘카퓌신’ 제작 과정. 루이 비통 제공 ‘미노디에르 카퓌신 나노 러닝 하트’에 크리스털을 장식하는 모습. 루이 비통 제공
루이 비통은 왜 이토록 가방을 예술작품화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일까. 명품은 본질적으로 상업적인 상품이다. 하지만 그 상업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원천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예술성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디자인과 장인의 기술, 오랜 세월 축적한 역사와 이야기까지.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야 하는 것이 명품 브랜드의 숙명이다. 루이 비통이 100년 넘게 예술가들과 협업해온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루이 비통은 1920년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르그랭과 협업한 것을 시작으로 광고와 제품 카탈로그, 여행 관련 물건 등의 제작 전반에 예술가들을 참여시켰다. 무라카미 다카시와 쿠사마 야요이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루이 비통과 한 번씩은 작업했다. 2014년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프랑스 파리에 열었다.

아티카퓌신은 이 같은 협업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발전시킨 사례다. 지금까지 한국의 단색화 거장 박서보를 비롯해 35명 넘는 현대미술 작가가 참여해 50개 이상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루이 비통 가방으로 구현된 예술 작품이 궁금하다면 키스 해링 컬렉션이 내년 1월 1일부터 전 세계 루이 비통 매장에서 한정판으로 출시된다고 하니 기다려보자. 미술관에서 감상하던 예술품이 매장 한편에 가방으로 진열된 것을 구경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