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이치 반포 124’ 단지에 들어설 아이스링크의 예상 모습 / 사진=현대건설
‘디에이치 반포 124’ 단지에 들어설 아이스링크의 예상 모습 / 사진=현대건설
"이제는 아파트 단지 내 실내 서핑장에서 파도를 타고, 오페라하우스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수영장이나 피트니스 센터는 명함도 못 내밉니다. " (부동산 업계 한 관계자)

서울 강남권은 물론 수도권과 지방 곳곳의 재건축·분양 현장을 보면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의 규모와 수준입니다. 과거 독서실이나 경로당 수준에 머물렀던 커뮤니티가 특급 호텔이나 대형 리조트를 방불케 하는 '호화 시설'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남권 고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불붙은 커뮤니티 고급화 바람은 이제 수도권을 넘어 지방 분양 시장까지 거세게 번지는 추세입니다.

건설사들의 수주전이 가장 치열한 서울 강남권 재건축 시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설이 예고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를 재건축하는 '디에이치 반포124'가 대표적입니다. 이 단지에는 단순한 레인 수영장을 넘어선 대형 워터파크와 실내 아이스링크, 입주민 전용 오페라하우스까지 들어설 예정입니다.

'재건축 대어'로 꼽히는 압구정이나 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건설은 '압구정 2구역' 재건축 단지에 인공 서핑장과 프라이빗 와인 저장소, 고가의 예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미술품 보관소 등을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GS건설 역시 성동구 성수1지구에 입주민의 건강을 전담해 관리하는 '헬스 케어 컨시어지' 센터를 도입할 계획입니다. 단지 밖을 나가지 않고도 레저, 문화, 의료 서비스까지 누릴 수 있는 '완결형 주거지'를 표방하고 나선 셈입니다.
현대건설의 ‘클럽 압구정’ 프라이빗 스튜디오에 있는 와인 저장고의 모습/  사진=현대건설
현대건설의 ‘클럽 압구정’ 프라이빗 스튜디오에 있는 와인 저장고의 모습/ 사진=현대건설
건설사들이 특화 경쟁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집주인들의 수요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2026 부동산 트렌드'에 따르면, 수요자들이 꼽은 '선호 주거 특화 요소' 1위는 단연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34%)이 차지했습니다. 2년 연속 1위 기록입니다. 여가를 보내는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도 뚜렷합니다. 평일과 주말 모두 '아파트 단지 내'에서 여가를 보낸다는 응답 비중은 2023년 12%에서 올해 26%로 3년 만에 2배 이상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집 안(가구 내)'에서 여가를 보낸다는 응답은 53%에서 44%로 줄었습니다. 커뮤니티 시설이 주거지를 선택하는 핵심 요소이자, 여가를 누리는 메인 공간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트렌드는 신축 분양 단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이엔드 신축의 화려한 커뮤니티를 지켜보던 기존 구축 아파트들도 앞다퉈 자금을 투입해 시설 업그레이드에 나서고 있습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리센츠'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준공 19년 차에 접어드는 이 단지는 지난 8월, 장기수선충당금 45억원을 과감하게 투입해 신규 커뮤니티 시설의 문을 열었습니다. 기존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강해 최고급 피트니스 센터와 GX룸, 카페, 스크린골프장을 갖춘 대형 골프연습장까지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막대한 공용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이견도 있었으나, 단지 가치 상승에 커뮤니티가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컸습니다. 리센츠의 성공적인 리뉴얼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단지들 역시 앞다퉈 커뮤니티 조성을 위한 주민 동의 절차에 착수하는 등 연쇄 반응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새로 문을 연 잠실 '리센츠' 커뮤니티 /사진=한경DB
지난 20일 새로 문을 연 잠실 '리센츠' 커뮤니티 /사진=한경DB
수도권을 강타한 커뮤니티 열풍은 지방 분양 시장으로도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달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서 청약에 나서는 '남춘천 센트레빌'은 비교적 소규모 단지임에도 불구하고 최상층인 39층에 파노라마 뷰를 즐길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와 게스트하우스 등 고급 커뮤니티를 조성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동구에 공급되는 '아이파크 무등산 스카이포레' 역시 사계절 이용할 수 있는 실내 수영장과 사우나, 골프연습장 등을 내세우며 지역 랜드마크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는 호화 커뮤니티 경쟁에 칼을 빼 드는 모습입니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공동주택 복리시설 설치 운영 연구' 용역을 발주하며 제도 정비에 착수했습니다. 최근 5년간 준공 및 승인된 150가구 이상 단지를 전수 조사해 규모별 적정 기준을 마련하고, 인근 지역 사회와의 상생 방안을 포함하는 법 개정까지 검토할 예정입니다.

정부가 제동을 검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거비 부담'입니다. 과도한 특화 커뮤니티는 필연적으로 공사비를 끌어올려 분양가 상승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입주 후에는 관리비 폭탄이나 장기수선충당금 고갈 등 장기적인 부담 요소로 작용할 우려도 제기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건설사가 시설의 장기 운영비와 구체적인 관리 계획을 사전에 공개하도록 하는 '입주민 고지 의무' 도입도 추진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건설 및 정비업계는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발하는 분위기입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다음 세대의 주거 형태가 나오기 전까지는 '커뮤니티'가 건설사 간의 거의 유일한 경쟁 지점이기 때문에, 앞으로 경쟁이 더욱 격화할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커뮤니티를 짓는 건설비나 향후 수십년간의 운영비 모두 입주민이 스스로 선택한 사유재산인데, 정부가 세부 내용까지 통제하려 드는 것은 과도한 개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