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식료품점에서 사용하는 전자 가격표. 사진=AP
한 식료품점에서 사용하는 전자 가격표. 사진=AP
미국에서 유통업체들이 인공지능(AI)과 개인정보를 활용해 소비자마다 다른 가격을 매긴다는 의혹이 확산하고 있다. AI가 구매 성향은 물론 급하게 물건이 필요한 사정까지 파악해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소비자 불신이 커졌다.

2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일리노이주 벨빌에 사는 닉 나도(38)는 최근 월마트 앱에서 하드디스크를 사려다 자신의 휴대전화와 아내의 휴대전화에 표시된 가격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자신에게는 369달러였지만 아내에게는 110달러 더 저렴했다. 월마트는 개인정보를 활용한 차등 가격이 아니라 오류였다고 해명했지만, 그는 기업이 개인정보를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용한다고 의심했다.

수요와 구매 시점에 따라 가격을 바꾸는 ‘동적 가격 책정’은 항공사와 호텔, 우버 등이 오래전부터 활용해왔다. 유통업체가 구매 이력에 따라 할인 혜택을 달리하거나 학생·고령자에게 별도 할인을 제공하는 것도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 6년간 미국 소비자물가가 29% 넘게 오르면서 가격 변화에 대한 소비자의 경계심도 높아졌다. 여기에 AI 기술이 더해지자 식료품점과 음식점, 차량호출 서비스까지 의혹이 번지고 있다.

월마트와 크로거, 맥도널드 등은 개인정보나 실시간 수요를 이용해 가격을 올린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맥도널드는 이달 가맹점들이 AI로 메뉴 가격을 정하거나 수요 변화에 맞춰 실시간으로 가격을 바꾸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달 초 소비자들이 메뉴 가격을 둘러싼 ‘알고리즘 가격 담합’ 소송을 제기하자 회사는 부정확한 사실이 많다고 반박했다. 소비자 반발이 거세지자 식료품 주문 플랫폼 인스타카트는 가변 가격 실험을 중단했다.

우려가 커지는 배경에는 기업의 정보 수집과 가격 변경 기술이 있다. 월마트와 애플 등을 회원사로 둔 비영리단체 퓨처오브프라이버시포럼의 AI 전문가 제임슨 스피백은 "데이터에 기반한 가격 책정은 오래됐지만, 기업이 확보한 개인별 정보는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지적했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가격을 빠르게 바꿀 수 있게 됐다.

특히 종이 가격표를 대신하는 전자 가격표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업체들이 소비자의 상품 관심도를 추적해 가격을 갑자기 올리거나 개인별로 바꾼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소비자단체와 일부 정치인들은 기업들의 관련 특허 취득과 개인정보 축적이 정교한 가격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럽 일부 식료품점은 전자 가격표로 일주일에 수백 차례 할인 가격을 적용하기도 한다.

다만 전자 가격표가 급격한 가격 인상을 부추긴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자 가격표는 유럽에서 10년 넘게 널리 쓰였다. 유럽과 미국의 연구에서는 수요 급증에 따른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 변경이 방문객에게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을 할인해 폐기량을 줄이는 데 활용됐다.

업체들은 전자 가격표가 종이 가격표 교체에 드는 시간을 줄여준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정해진 시간에 가격을 올리며 월마트도 고객 혼란을 막기 위해 통상 영업 종료 후 가격표를 바꾼다고 밝혔다. 존 퍼너 월마트 CEO는 지난달 고객에게 보낸 서한에서 소득이나 구매 이력, 갑작스러운 필요를 이용해 더 높은 가격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세성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