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퍼드대 인공지능(AI) 연구실에서 2019년 탄생한 스노클AI는 올해 ‘반전 드라마’를 썼다. 2021년 데이터 분류 사업으로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이 된 후 4년간 성장 정체를 겪다가 지난 9월 연환산매출(ARR) 3억7500만달러(약 4950억원)를 달성했다. 1년 전보다 18배 증가한 수치다.
비결은 사업 전환이었다. 데이터 분류용 소프트웨어를 팔던 스노클AI는 지난해 AI 학습용 고품질 데이터를 공급하는 회사로 본격 탈바꿈했다. 이 회사는 의사, 변호사, 시니어 엔지니어 등 최고 전문가의 전문 지식(규칙, 가이드라인)을 기반으로 수백 개 특화형 AI 에이전트가 학습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공급한다. 공식 파트너인 오픈AI 등이 주 고객사다.
◇파산 기업 데이터에 입찰 경쟁
AI가 고도화하면서 사내 이메일부터 공장 작업자의 손놀림에 이르는 ‘고품질 데이터’가 AI산업의 새 수익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파산 기업이 데이터의 보고가 됐을 정도다. 미국 초저비용항공사 스피릿이 본보기다. 지난 5월 파산을 신청한 지 3개월 만에 구글, 머코어, 마이크로1 등 3개 기업이 스피릿에 남아 있던 1억 개 넘는 이메일, 고객 채팅 1600만 건 등을 확보하기 위해 각각 1000만달러, 750만달러, 1250만달러를 써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웹페이지에서 긁어올 수 있는 데이터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게 첫 번째다. 비영리 AI 연구기관 에포크AI는 2024년 AI 학습에 쓸 수 있는 공개된 텍스트가 이르면 올해 소진될 것으로 판단했다. AI 모델의 수준이 발달한 영향도 있다.
알렉스 래트너 스노클AI 최고경영자(CEO)는 “모델이 아는 게 없을 때는 거의 모든 데이터가 새 정보겠지만 AI가 전문가 수준에 도달하면 적절한 품질과 복잡성을 갖춘 데이터로만 성능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오픈AI와 앤트로픽은 외부에서 데이터를 구매하고 있으며, 이 중 앤트로픽은 인적 데이터 운영팀을 따로 뒀다.
데이터를 구하려다가 논란이 된 사례도 있다. 메타는 지난 4월 직원들의 컴퓨터 작업 과정을 녹화해 AI 학습에 활용하려다가 반발을 사 두 달 만에 중단했다.
◇피지컬 AI 분야 특히 심해
AI 데이터의 외주화는 ‘데이터 벤더’라는 새 산업 생태계를 조성했다. 스노클AI 외에 머코어, 마이크로1 등은 변호사, 엔지니어, 박사후연구원 등 고급 인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실제 업무형 문제를 풀도록 하거나 모델의 답변을 평가해 고품질 데이터를 생성하고 있다. 기업 데이터는 사내 기밀을 알아볼 수 없도록 비식별 처리하기도 한다.
피지컬 AI 분야는 데이터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인터넷 데이터를 기초로 하는 대규모언어모델(LLM)과 달리 생산 현장의 데이터는 각 기업만 보유하고 있어서다. 2015년 설립된 인력 외주회사 인스타워크의 에런 브롬버그 로봇사업 총괄은 지난 20일 기자와 만나 “올해 로봇업계 전체에 제공되는 로봇용 영상 데이터는 2000만 시간 분량인데 실제로 필요한 데이터는 그 43배인 10만 년 수준”이라며 지난해 로봇 데이터 수집 사업을 확장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인도, 동남아시아 등 개발도상국 공장 직원에게 학습용 장비를 착용시키고 영상 데이터를 수집하는 업체도 늘고 있다.
거의 모든 제조업을 갖춘 한국에는 기회다. 다만 대기업과 달리 중소·중견기업은 현장 경험을 데이터로 남길 준비가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제조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업의 75.7%는 수기에 의존하고 있다. 실시간 수집 비중은 19.7%에 그쳤다. 사내 데이터 관리도 미흡하다.
오픈서베이가 지난해 8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81%는 카카오톡을 업무용 메신저로 쓰고 있다. 카카오톡은 접근성이 높지만 기업 차원에서 데이터를 관리하기에는 인수인계가 불편하고 사적인 용도와 분리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