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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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 HD현대중공업 건물에 붙어 있는 문구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한 말이다. 근로자, 회사 그리고 국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HD현대중공업은 1983년 세계 1위 조선업체에 등극했다. 한국에서 중산층을 양산하는 창구가 됐다. 현대뿐 아니다. 산업화 시대 한국은 이해관계가 비교적 정렬돼 있었다. 국민은 잘살기 위해 일했고, 1세대 창업자들은 이들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키웠다. 그리고 이를 사업보국, 수산보국 등 국가의 발전으로 연결했다. 우수한 공무원은 국가의 산업지도를 그리고 산업 발전을 지원했다.

한국 산업화는 이 같은 이해관계와 보상체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지금은 다르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졌다. 직장에서는 일을 더 하는 것이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젊은 공무원은 언제든 민간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의사는 필수의료 대신 성형외과, 피부과로 쏠린다. 잘해도 내 몫이 아니고 잘못되면 과도한 책임을 져야 하는 ‘어긋난 보상표’가 한국 사회 곳곳에 깔려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게 손해’


한국 근로자 두 명 중 한 명(51.8%)은 업무에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쓰고 있다. 지난해 말 한국은행이 조사한 결과다. 앤트로픽이 지난해 국가별 클로드 사용량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세계적인 ‘얼리어답터’의 나라였다. 한국의 AI 사용량은 세계 5위로 미국을 앞질렀다. 하지만 생산성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한은이 지난 6월 AI 도입의 생산성 향상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국내 취업자 5512명을 조사한 결과 시간당 노동 생산성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AI를 쓰는 직장인은 업무시간을 주당 1시간30분 줄였지만 업무 처리량은 늘지 않았다. 연구팀은 “추가 성과에 대한 보상이 미약하다면 남는 시간을 생산적 활동에 투입할 유인이 적어진다”고 진단했다.
"일하면 손해" 젊은 공무원들 짐 싸고…의사는 분만실 떠났다
개인이 열심히 일할 의욕이 꺾이는 가장 큰 이유는 연공서열 중심의 직장 내 보상 구조다. 산업 성장기엔 장기근속을 보상하는 체계가 직원의 숙련도와 충성도를 쌓는 데 유용했다. 하지만 기술과 직무가 급변하는 시대에도 성과에 따른 보상이 이뤄지지 않자 ‘열심히 일하는 게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AI로 아낀 시간을 여가 활동과 휴식에 쓰는 것이 개인에게 합리적 선택이 됐다.

서비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보상이 박한 것도 한국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한국에서는 소프트웨어 개발, 컨설팅 등에 대한 보상을 ‘몇 명의 인력이 며칠 동안 상주해 일했는가’를 따져 책정한다. 단위는 개발자 한 명이 한 달 동안 생산할 수 있는 작업량 단위 ‘맨먼스’다. 초급·중급·고급으로 나눠 차등 적용하지만 획일화된 가격표가 있어 결과물이 창출하는 가치(매출 증대, 비용 절감 등)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 결과 한국의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49.4%에 그친다. 주요 7개국(G7) 평균(86.7%)의 절반 수준이다.

사람이 아니라 ‘게임 규칙’을 바꿔야


공직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엘리트’라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치던 관료 조직은 더 이상 일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책 결정권은 국회와 청와대로 넘어간 지 오래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앞선 정부에서 정책을 집행한 공무원이 걸핏하면 감사와 수사 대상이 된다. 한 경제부처 서기관은 “청운의 꿈을 품고 왔지만 보상 없이 ‘무한 책임’만 지우니 최소한의 일만 하게 됐다”며 “후배들을 붙잡을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행정연구원 조사에서 신입 5급 공무원의 49.1%(2023년)는 이직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보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3분의 1에 달했다. 김경동 행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공공 봉사 동기에 기반한 개인의 가치가 공직 사회의 가치와 정렬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필수 의료 붕괴도 잘못된 보상 시스템의 결과다. 전국 250개 시·군·구 중 3분의 1에 달하는 77곳(2024년 말)은 분만 의료기관이 아예 없다. 산부인과 간판을 달았어도 분만 수가를 한 건이라도 청구한 곳은 전체 1320곳 중 153곳(11.6%)에 불과했다.

전문의가 분만실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분만은 24시간 의료진과 시설을 대기시켜야 하지만 건강보험 수가 보상은 인색하다. 이에 비해 사고가 나면 의사 개인이 져야 하는 배상과 소송 위험은 크다. 결국 분만실 대신 당직을 안 해도 되고 소송 위험도 작은 진료과를 택하는 의사가 늘고, 그런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모여 사회의 손실이 된다.

199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를 ‘사회의 게임 규칙’이라고 정의했다. 법과 세금, 조직 문화와 관행 같은 공식·비공식 제도가 인센티브 구조를 구축하고, 사람들은 그 보상과 비용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분만실 대신 위험이 낮은 진료를, 적극 행정 대신 복지부동을, 추가 성과를 내는 대신 정해진 일만 하는 개인의 선택은 규칙이 그렇게 보상한 결과다. 노스는 “개인이 얻는 보상과 사회 전체가 얻는 가치의 간극을 줄이는 제도가 장기 성장의 토대”라고 강조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