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사회연대? 손 쉬운 부자 증세만으로는 불가능"
“한국인의 삶은 미국식 경쟁에 익숙한데, 담론은 유럽식 사회 연대에 맞춰져 있습니다. 갈 길을 정하지 못하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죠.”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사진)는 한국에서 개인의 노력과 성취욕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럽식 사회연대와 미국식 자유경제 중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이해관계 정렬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정치가 손쉬운 선택만 반복하는 사이 ‘골든타임’은 흘러갔다. 장 교수는 “유럽식 복지국가로 가려면 성장하는 제조업과 두터운 중산층이 있어야 한다”며 “고령화·탈산업화 사회에 들어선 한국은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그는 “성과에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보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한국식 삶에 맞는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선진국 모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쪽에도 없습니다. 유럽식은 모두가 능력에 따라 세금을 많이 내고 두터운 혜택을 받습니다. 근로자 대다수를 대표하는 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임금과 고용의 규칙을 함께 정하죠. 미국식은 세금을 적게 걷고 복지는 취약계층에 선별적으로 주는 대신, 공정한 기회와 유연한 노동시장 위에서 성과를 내면 크게 보상하고 못 내면 제재합니다. 한국은 어느 하나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습니다.”

▷한국인은 북유럽형 복지 국가를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유럽식 복지 국가의 핵심은 ‘사회적 연대’입니다. 연대의 사회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기여하고 누구나 그로부터 혜택을 받는 사회예요.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득·자산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누진성, 다른 하나는 넓은 세원이죠. 누진성은 어느 정도 확보됐어요. 세원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수, 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지난 30여 년간 이 숙제를 미뤘습니다.”

▷왜 그런가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보편 증세 대신 손쉬운 부자 증세만 한 것이죠. 한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지방세를 포함하면 4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수는 OECD 평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돼요. 상위 10%가 전체 소득세의 76%를 내기 때문이죠. 세수 통계를 보면 한국이 OECD 국가보다 GDP 대비 더 많이 내는 세금은 법인세와 재산 관련 세금입니다. 특히 보유세와 거래세를 합친 재산 관련 세수 비중은 OECD 평균 두 배가 넘습니다.”

▷사회적 연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연대의 출발점은 조세입니다. 여하지 않았으면 돌려받을 정당성이 없다는 원칙이 제도로 정립돼야 계층을 뛰어넘는 연대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런 원칙은 외면하고 선심성 복지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로소득 환수’ 같은 구호로 고소득자와 자산가를 악마화하죠. 세금을 내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고, 세금을 안 내면서 복지를 누리는 사람은 당연한 혜택으로 여기니 사회적 연대가 생길 리 만무합니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세계적인 현상 같습니다.

“특이한 건 OECD의 다른 선진국은 이민자 혐오 같은 우파 포퓰리즘이 힘을 얻는데, 한국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남미식 좌파 포퓰리즘이 득세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에요. 세금 낼 사람은 줄어드는데 복지 지출은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얘기죠. 이런 상황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득세하면 세원 확대 대신 부자 증세로 지출을 늘리겠다는 약속만 쉽게 하게 됩니다. 독박 부담을 지는 자산·소득 상위층은 연대에 참여하는 대신 탈출을 택하고, 사회 전체의 담세 능력이 훼손될 위험이 커집니다. 초고령화사회와 좌파 포퓰리즘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조합입니다.”

▷유럽식 연대 모델은 결국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은 제조업 황금기에 이뤄졌습니다. 북유럽형 ‘고부담 고복지’ 국가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모든 국민이 많은 세금을 내는 겁니다. 특히 제조업에 종사하는 중간 소득자가 많이 내죠. 그래서 제조업 성장기가 복지 국가를 이루기 유리한 시기입니다. 한국은 이미 그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죠. 인공지능(AI)이 성장률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중간 소득 일자리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식 모델이 현실적입니까.

“미국식 인센티브 사회의 장점도 큽니다. 격차를 인정하면 도덕적 해이가 사라지고, 이해관계 정렬이 잘돼 있다면 개인의 성취 욕구가 사회의 집단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죠. 사실 경쟁과 물질주의에 익숙한 한국인의 삶은 미국식 모델에 적합합니다. 입으로는 고담준론을 말하지만 행동은 강남 부동산을 원하고 자녀를 미국에 보내려는 게 현실이니까요. 86세대의 위선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젊은 세대는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보상받는 것에 대한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우리 사회에 맞는 이해관계 정렬을 위해 어떤 제도를 정비해야 할까요.

“연공제 중심의 임금체계를 성과 중심으로 바꾸는 동시에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한국 기업은 지금 굉장히 모순적인 입장에 처해 있어요. 기업 활동을 하려면 고용을 해야 하는데, 동시에 어떻게 해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못하면 확실한 보상과 제재,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 구조를 제도화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봤자 보상에 차이가 없으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그 개편은 누가 이끌어야 합니까.

“정부입니다. 정권을 막론하고 이제까지 정부는 사회적 대화나 노사정 합의라는 틀 뒤에 숨어 책임을 미뤄왔습니다. 이제는 면피용 수단이 된 사회적 대화를 핑계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시장의 규칙을 바꾸니 정책에 대한 신뢰와 사회적 연대가 무너집니다.”

▷또 무엇이 필요합니까.

“시장의 작동 원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금융시장이 신용을 평가하는 겁니다. 신용을 잘 쌓은 사람과 기업이 가장 많은 자원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이 기능을 훼손하면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심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