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37년간 일한 ‘기호’(최민식 분)는 창업 3년 만에 연매출 100억원을 달성한 패션 스타트업에 재취업한다. 직함은 ‘실버 인턴’. 조직 내 직급은 가장 낮지만 단숨에 인기 사원으로 자리 잡는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사람을 대하는 노련함으로 업무에 서툰 스타트업 직원들을 돕고 조직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한 덕분이다.
하지만 영화 ‘인턴’ 속 기호는 스크린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마친 60대 남성 A씨에게 기호의 활약상은 말 그대로 영화 속 이야기다. A씨는 자신의 경험과 역량을 살릴 ‘인생 2막’을 기대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경비나 택배 정도”라고 토로했다. 수십 년간 기업 현장에서 쌓은 전문성이 퇴직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쓸모를 잃은 셈이다. 영화 속 기호보다 현실의 A씨 사연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는 배경에는 고령자 일자리마저 획일적으로 제한하는 현행 파견법 규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 기업 임원도 ‘월 200만원’ 일자리로
‘일하는 고령자’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29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취업자는 414만7000명으로 전년보다 34만2000명 증가했다. 문제는 대기업 등에서 전문성을 쌓은 고숙련 시니어들조차 은퇴 후 ‘하향 취업’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이 글로벌 인적자원(HR) 솔루션 기업 맨파워코리아를 통해 입수한 65세 이상 파견근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 회사를 통해 파견된 고령 근로자 242명 중 64%(155명)가 ‘일시·간헐적’ 업무, 사실상 임시직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73명은 건물 청소, 음식 조리, 자동차 운전, 경비 등 단순 노무 업무를 맡았다. 반면 행정·경영·재정·컴퓨터 관련 전문가와 사무지원, 고객 관련 사무 등 전문·사무직에 투입된 인원은 13명에 불과했다.
전문성을 살려 재취업한 고령자의 소득은 단순 노무직과 큰 격차를 보였다. 65세 이상 파견근로자 가운데 행정·경영·재정 전문가의 월평균 급여는 약 703만원으로, 전체 임금근로자 월평균 임금(약 320만원·8월 기준)의 2배를 웃돌았다. 컴퓨터 관련 전문가도 월평균 521만원을 받았다. 일부 고령 근로자는 월 1000만원이 넘는 급여를 받기도 했다. 반면 건물 청소 업무에 파견된 고령 근로자의 월평균 급여는 175만원에 그쳤다. 음식 조리는 208만원, 수위·경비는 226만원이었다. 올해 주 40시간 근무 기준 월 환산 최저임금(약 216만원)과 유사한 수준이다.
하지만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재취업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IT·금융업계에서 인사담당 임원으로 일한 60대 여성 은퇴자 B씨도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한 외국계 영상 솔루션 기업에서 인사담당자가 육아휴직을 하면서 대체 인력이 필요해지자 ‘예외 사유’를 적용받아 가까스로 파견 일자리를 구했다. HR업계 관계자는 “은퇴자의 전문성과 경험을 활용할 경우 단순 노무직보다 훨씬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고용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면서도 “현행 제도 아래서는 극소수만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 전문성 있어도 ‘파견법’에 발목
전문가들은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해서는 파견법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파견은 파견업체가 근로자를 고용하고, 실제 근무하는 기업이 업무상 지휘·명령을 하는 고용 형태다. 기업 입장에서는 필요한 시점에 고숙련 시니어의 경험과 역량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행 파견법은 근로자 파견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전문지식·기술·경험 등을 고려해 32개 업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기업의 직접고용을 유도해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이 때문에 인사·노무·재무 등 분야에서 풍부한 실무 경험을 갖춘 시니어라도 해당 직무가 파견 허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면 파견 형태로 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60세 이상 고령자에게도 동일한 파견 규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면서 오히려 고령자 고용시장이 위축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견은 파견업체가 노무관리를 맡고, 기업은 필요한 기간과 직무에 맞춰 인력을 활용할 수 있어 인력 운영의 부담을 덜어준다. 반면 직접 고용하면 퇴직금과 산재 대응, 근태·노무관리 등의 부담을 기업이 직접 떠안아야 한다.
규제 일변도의 파견 정책 속에 파견시장 자체도 빠르게 쪼그라들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파견근로자는 9만675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24.9%(3만81명) 감소했다. 같은 기간 파견계약 건수도 1만4471건에서 1만3205건으로 8.7% 줄었다. 상시 파견이 가능한 32개 허용업무 종사자 역시 11만1374명에서 7만9158명으로 급감했다.
황희승 브레인커머스 대표는 “정규직 재취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65세 이상 시니어에게 파견 근로는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일자리 통로인 만큼, 고령층의 현실에 맞게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