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스마트폰에서 업무용 앱 팀즈를 실행한다. 데이터는 일반 인터넷망을 거치지 않고 회사 내부망으로 들어간다. 같은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을 켜면 이번에는 일반 인터넷망에 연결된다. 앱에 따라 다른 통신망을 적용하는 것이다.
KT가 연내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앱 슬라이싱’ 기술이다. 핵심에는 ‘URSP(User equipment Route selection Policy·사용자 경로 선택 정책)’라는 5G 기술이 있다. 기지국이 앱에 따라 어떤 네트워크를 쓸지 결정하는 방법이다. 업무용 앱은 보안이 적용된 기업망으로, 개인용 앱은 일반 인터넷망으로 자동 분리할 수 있다. KT는 현재 삼성전자·구글 등과 스마트폰에서 이 기술을 구현하기 위한 검증을 하고 있다.
‘버스 전용차로’와 비슷
이를 가능하게 한 건 5G망을 여러 개의 독립된 논리망으로 나누는 ‘5G 네트워크 슬라이싱’ 기술이다. 같은 기지국 안테나와 장비, 광전송망, 코어망 서버를 공유하면서도 서비스별 트래픽에는 서로 다른 ‘꼬리표’를 붙여 처리한다.
네트워크 슬라이싱은 5G 단독모드(SA)에서 구현되는 기능이다. 5G 비단독모드(NSA)는 LTE 코어망을 함께 이용한다. 5G SA는 LTE 코어망에 의존하지 않고 5G 전용 코어망을 이용한다. 이 구조를 기반으로 초저지연·대량연결과 함께 서비스별로 통신 자원을 분리하는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구현할 수 있다.
작동 원리는 ‘소프트웨어로 운영하는 가변차로’다. 트래픽이 망에 들어오면 일반 스마트폰 데이터인지, 방송 영상인지, 공장 로봇의 제어 신호인지 식별한다. 기지국은 이 정보를 토대로 시간·주파수 등 무선자원을 배분한다. 코어망에서는 데이터가 지나갈 경로와 우선순위, 보안 정책 등을 서비스별로 달리 적용한다. 주파수를 물리적으로 잘라 별도 망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기지국의 자원 배분과 우선순위를 소프트웨어로 조절한다.
재난시 망 분리 가능해져
이렇게 되면 재난 현장에서 일반 이용자의 영상 전송이 폭증해도 재난 대응용 트래픽에 필요한 자원을 먼저 배정할 수 있다. 통신사로서는 5G의 과금 단위를 바꿀 수 있다.
지금까지 데이터 용량과 전송속도를 팔았다면 앞으로는 지연시간과 신뢰성, 보안 등 ‘망의 품질’을 상품화할 수 있다. 스마트팩토리와 자율주행, 로봇에는 장기 계약으로, 축제·스포츠 경기에는 단기 상품으로 제공하는 식이다.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글로벌 5G 네트워크 슬라이싱 시장이 지난해 6억2522만달러에서 2034년 163억744만달러(약 22조6000억원)로 약 26배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활용처도 넓어질 수 있다. 공장 로봇과 같은 피지컬 AI는 센서와 영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올리고 제어 명령을 받아야 한다. 단순 다운로드 속도보다 업링크 용량과 지연시간, 통신 안정성이 중요하다.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이용하면, 이런 AI 서비스에 필요한 통신 자원을 별도로 배분할 수 있다.
유럽선 ‘망 사용료’ 대안으로 등장
통신업계가 네트워크 슬라이싱에 눈을 돌리는 데에는 수년간 이어진 ‘망 사용료’ 논쟁도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확산 등으로 데이터 사용량이 급증하자 통신사들은 빅테크에도 망 투자비를 분담시켜야 한다는 ‘공정기여’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결 구도는 쉽게 조정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최근 유럽에서는 빅테크에 비용 분담을 법으로 강제하는 방안과 별개로 네트워크 슬라이싱으로 새로운 수익원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티모테우스 회트게스 도이치텔레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공정기여 논쟁은 포기했다”며 빅테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비용을 회수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도이치텔레콤은 혼잡 상황에서 게임·영상통화 품질을 높이는 ‘5G+ 울트라’ 상품을 내놨고, 보다폰은 기업용 ‘5G+ 로컬 슬라이싱’을 상용화했다. 영국 EE도 혼잡할 때 별도의 네트워크 슬라이싱으로 통신 품질을 보장하는 ‘패스트 래인’을 출시했다. ‘몇 기가바이트(GB)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품질의 망을 쓰느냐’에 값을 매기는 시장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망 중립성 훼손 우려도
네트워크 슬라이싱에도 넘어야 할 산은 망중립성이다. 모든 인터넷 트래픽을 차별 없이 처리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면 돈을 더 낸 기업에 별도 품질을 보장하는 슬라이싱이 차별 서비스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네트워크 슬라이싱 자체가 같은 통신망 안에서 특정 서비스에 별도 ‘차로’를 내주는 기술로 간주돼 망중립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많다.
글로벌 통신정책 전문가인 로슬린 레이턴 스트란트컨설트 부대표는 지난 7일(현지시간) 기자와 만나 “모든 트래픽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난센스”라며 “낮은 지연시간과 높은 신뢰성을 제공하는 전용 망은 서로 다른 서비스”라고 했다. 기업이 더 좋은 품질의 망에 돈을 받는 것 자체를 망중립성 위반으로 봐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레이턴 부대표는 이어 “일반 인터넷의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경쟁 서비스를 차별할 때 규제기관이 개입하면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