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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분노도 감춘 한국…완벽해 보이는 건 죽음에 가까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인터뷰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첫 방한
"AI는 관점 없어…문학 대체 못해"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첫 방한
"AI는 관점 없어…문학 대체 못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칠레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는 단호했다. 지난 11일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열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AI가 인간의 창작마저 대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올해 축제가 '누구세요?'라는 주제 아래 AI 시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 만큼 인터뷰에서도 AI와 인간의 창작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라바투트는 과학사의 실존 인물과 사건에 허구를 뒤섞어 인간의 지식과 광기, 진보의 위험을 탐구해온 작가다. 과학자들의 발견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순간을 그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20세기 천재 존 폰 노이만을 중심으로 과학과 AI의 역사를 파고든 <매니악> 등이 국내에 번역돼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AI에는 작가의 '관점'이 없다"
라바투트가 문학을 AI가 쉽게 넘보기 어려운 영역으로 보는 것은 문학이 애초에 예측과 규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학은 무의식에서 출발해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입니다. 활화산과 같아서 그 원천이 어디인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죠. 우리는 문학의 지도를 대략 그릴 수 있을 뿐 그 정수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AI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방대한 기존 데이터를 학습해 확률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AI와 달리 예술가는 기존의 규칙을 깨고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작가는 최대한 클리셰에서 벗어나고 통계적인 규범을 깨려고 합니다. 젊은 시절의 밥 딜런을 생각해보세요. (웃음)"
그런 예측 불가능성의 바탕에는 한 인간만의 고유한 '관점'이 있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제한된 경험과 기억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무엇을 쓸지 선택한다. 라바투트는 바로 그 한계가 AI와 인간을 가른다고 봤다. AI는 고유한 관점을 갖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문체와 스타일을 복제해올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한계가 역설적으로 작가의 고유성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에게 좋은 예술은 애초에 흔할 수 없다. 라바투트는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수많은 책이 나와도 20년, 50년, 100년 뒤 살아남는 작품은 극소수일 겁니다. 정말 소중하고 희귀한 것만 살아남죠. 그래서 작가란 성공을 확신하며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을 이미 받아들인 채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사람에 가깝죠."
문학에서는 AI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봤지만, AI가 인간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훨씬 비관적이었다. 특히 AI가 '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AI는 피곤해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끔찍하고 취약한 측면을 모아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죠."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드러냈다. "과학적 진보는 어느 지점에서는 멈춰야 합니다. 우리를 계속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더 많은 힘과 돈을 원하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탐욕이 "인류를 멸종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기술이 아니라 "지혜와 사랑"이라고도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의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독특한 작법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라바투트는 "현실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블랙홀의 특이점이나 인간의 광기처럼 이성만으로 붙잡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는 픽션이 필요하다.
"픽션은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두웠던 곳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사용하죠."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인 라바투트에게 한국은 어떻게 보였을까. 인간과 세계의 미세한 균열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작가답게 그는 짧은 체류 중에도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기류를 감지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놀라울 만큼 발전하고 완벽해 보이는 동시에 어딘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회였다.
"사람들이 서로 눈을 잘 마주치지 않고,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사랑에 빠지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뭔가 분노가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 된 한국을 "요즘 세계가 경외하는 나라"라고 표현하면서도 저출생과 인구 감소를 우려했다.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완벽한 것은 죽음과 굉장히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결함과 흠집은 용기에서 출발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은 엉망진창일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는 현재 1850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디지털 논리'의 역사를 다룬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다. 참과 거짓, 0과 1로 세계를 환원하는 논리가 어떻게 현대인의 삶을 만들었는지를 파고드는 작품이다. "디지털 세계는 우리에게 더 많은 힘을 주는 동시에 삶을 더 빈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0과 1로 환원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속성과 같은 것들이죠. 저는 그런 것들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