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예술의전당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리사이틀 리뷰
‘모스크바의 종’으로 강약 살려 굴곡 분명한 연주
폭발적인 소리에 잔향 섞이며 공간감 넓어져
‘10개의 전주곡’ 6번에선 아버지 된 라흐마니노프 드러나
2021년 부조니 콩쿠르 5관왕에 올랐던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4곡 모두를 한 자리에서 연주했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 공연에서 강렬한 타건과 꼼꼼한 해석으로 자신만의 라흐마니노프를 선보였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박재홍.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Rowan Lee
1999년생 박재홍에겐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은 언젠가 올라야 할 산이었다. 부조니 콩쿠르 결선에서 우승을 안겨줬던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꼽았던 201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결선에서도 같은 곡을 연주했다. 2년 전 스크랴빈 전주곡 전곡으로 앨범을 내고 공연을 벌인 그였기에 전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조합은 그럴 만한 수순이었다.
우뚝 솟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처럼
가벼운 느낌의 검은 블레이저를 입고 무대에 오른 그는 연대순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을 하나씩 연주했다. 첫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19세에 쓴 환상 소품 속 전주곡. ‘모스크바의 종’으로 불리는 이 곡에서 박재홍은 왼손으로 저음부를 뚜렷하게 누르면서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상체의 힘을 살려 건반 위에서 뛰어 누르듯 하는 타건이 돋보였다. 약세도 충분히 살리면서 굴곡이 분명한 음악을 했다. 강약의 선명한 대비에 온 힘을 더할 때 나오는 연주자의 숨소리가 엮이면서 연주엔 서스펜스 영화 같은 몰입감이 생겼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박재홍.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Rowan Lee
라흐마니노프가 30대에 이르렀을 즈음 썼던 10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3번)에선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을 청각으로 되살리는 듯한 연주가 이어졌다. 1번 곡은 단호하면서도 잔향을 길게 남기는 여운이 돋보였다면 2번 곡은 왼손으로 빚은 단단하고 명징한 저음부와 오른손으로 민첩하게 만든 구획된 리듬감의 대조가 흥미로웠다. 열과 성을 다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모습은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의 손길과 닮아 터치 한 번 한 번이 일종의 도약 같았다.
4번에선 서정성을 살린 프레이징(악구 구분법)의 맛이 잘 살아났다. 억제보다는 분출의 배분에 초점을 둔 인상이었다. 5번에선 쏟아지는 음들이 콘서트홀 내벽과 부딪치면서 소리가 빽빽했다. 수직적인 층을 이룬 건물 구조보다는 굳건하게 솟은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닮은 음악이었다. 어택(건반을 누르는 순간부터 최고 음량에 도달하는 과정)이 분명하지만 잔향이 뭉개지면서 그려진 풍경이었다. 손의 무게와 음량의 폭을 살려 횡적으로 넓은 그린다는 점에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매력이 잘 드러났다.
강렬한 타건에 관객 놀라기도
6번에선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이 흑백영화처럼 그려졌다. 이 곡엔 라흐마니노프가 첫 딸이 태어났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쁨을 담아 작곡했다는 일화가 있다. 박재홍은 작곡가의 기쁜 감정을 직접적이기보다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자녀의 탄생을 반기는 와중에 가장으로서 느꼈을 무게감까지 담긴 연주였다. 10번 곡은 공연 1부의 백미였다. 한 음과 이어 오는 음이 조금씩 달라 그 다음 낼 소리에 궁금증을 일으켰다. 전주곡(prelude)의 어원인 ‘lude'가 유희에서 왔다는 점이 잘 드러난 연주였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박재홍.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Rowan Lee
공연 2부에선 라흐마니노프가 30대 후반에 선보인 나머지 전주곡 13곡(작품번호 32번)을 다뤘다. 무대에 다시 올라선 박재홍은 피아노에 앉는 것과 동시에 건반을 눌렀다. 건반에 앉았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갑작스러운 피아노 소리는 관객을 놀라게 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연주를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3번 곡에선 건반을 플라이어(펜치)로 뽑는 것처럼 힘껏 눌렀다 튀기는 타건이 강렬했다. 이에 놀란 관객 일부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장·단조가 엇갈리는 곡 구성에 맞춰 박재홍은 힘을 분배하면서도 속도감은 일정 수준으로 유지했다. 망치질 같은 타건은 야수성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서도 오랜 연구로 계산된 것처럼 보이는 힘의 나열 과정은 지적이었다. 큰 소리로 시작한 8번에선 완성도 높은 기교와 음의 공간감 배분이 잘 어우러졌기에 조형미가 빛났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박재홍.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Rowan Lee라흐마니노프 가곡으로 마무리
10번은 연주자 개성의 집약체였다. 터질 듯한 압박을 수차례 받은 건반에서 나온 음들은 서로 뭉개지면서 겹겹이 진해졌다. 마치 검은색 크레파스로 덧칠하길 반복하는 것 같았다. 땅에 속박된 채 튕겨졌다가 이내 가라앉는 짧은 음형은 폭탄처럼 터지더니 점점 희미해지며 공연장의 공기와 섞였다. 11번은 경건한 면이 있었다. 마지막 13번에선 수수하게 깔린 저음 위로 뚜렷한 선율이 명징했다. 울창한 숲을 뚫고 암벽을 오르던 등산가가 마침내 정상에 올라 눈부신 햇살을 마주한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한 80여분의 연주에 관객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재홍은 앙코르로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5번을 연주한 뒤 가곡 ‘라일락’과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피아노로 들려줬다. 박재홍은 조지아로 건너가 오는 12일 첼리스트 키안 솔타니와 듀오 공연을 연다. 14일 카타르에서 카타르 필하모닉과 협연한 뒤 다음달 6일 국립심포니와의 공연으로 한국 관객을 다시 만난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박재홍.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Rowan Lee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