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권의 성과, 국민에 청구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5일 미국 방문을 계기로 국내 기업과 글로벌 빅테크가 5년간 총 9500억달러(약 1375조원) 규모의 반도체 협력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금액만 놓고 보면 올해 정부 총지출의 약 두 배다. 반도체가 다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 올해 건강보험 재정이 5조원대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정부는 건강보험료 상·하한을 함께 올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최저보험료 가입자의 부담이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다. 건강보험 적자가 반도체 투자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은 묻는다. 나라가 1000조원이 넘는 협력을 이끌어냈다는데, 왜 내가 체감하는 것은 건강보험료 인상인가.

13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날 세수를 전략적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고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미래 성장동력 투자는 필요하다. 그러나 추가 세수를 새로운 사업에 배분하기에 앞서 기존 제도와 시설의 유지비용을 충분히 반영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정부는 이 같은 의무 중 무엇을 이행하지 못했는지도 함께 공개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일반회계와 건강증진기금을 통해 보험료 예상 수입의 20% 상당을 지원하도록 돼 있지만, 올해 예산상 정부지원액은 14.2% 수준이다. 22일 지역·필수·공공의료 간담회에서 대통령도 그동안 정부가 국고 지원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건강보험 적자는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 등 구조적 요인의 결과다. 그렇더라도 가입자의 부담을 늘리기에 앞서 국가의 몫부터 정당한지 따져봐야 한다. 국가가 부담하지 않은 비용을 국민의 보험료로 돌린다면 정부의 성과와 국민의 청구서는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기업은 투자할 때 유지투자와 성장투자를 구분한다. 유지투자는 기존 설비의 생산능력과 안전, 품질을 지키는 투자다. 성장투자는 신사업과 연구개발, 인수합병을 통해 미래 수익을 만드는 것이다. 유지보수를 미룬 채 성장투자에만 집중하면 당장은 성과가 좋아 보이지만 설비 고장과 품질 저하가 누적돼 그 성장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기업은 기존 사업에 필요한 유지투자를 먼저 계산한 뒤 성장투자의 규모를 결정한다. 국가재정도 다르지 않다. 새 기금과 대규모 투자계획, 산업클러스터 착공은 현 정부의 성과로 남는다. 이에 비해 건강보험 국고 지원처럼 국가의 부담을 이행하거나 기존 시설과 공공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재정은 집행해도 별로 티가 안 난다.

그렇다고 미래 투자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순서다. 새로운 사업에 재원을 배분하기 전에 국가의 기존 의무와 시스템 유지비용부터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나 다음 정부의 부담으로 옮겨간다. 정부는 추가 세수의 사용계획과 함께 ‘국가 의무·유지비용 명세서’를 제시해야 한다. 법정 의무의 미반영액과 기존 시스템의 유지비용, 신규 사업의 운영비·인건비·수선비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국회도 이 명세서를 토대로 신규 사업에 실제로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이 얼마인지 검토해야 한다.

정권에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래서 임기 내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유혹이 크다. 국민은 대통령이 무엇을 시작했는지만 보지 않는다. 임기가 끝난 뒤 무엇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본다. 국가의 의무를 먼저 지키고 미래 투자를 설계할 때 정권에 대한 신뢰도 오래갈 수 있다. 정권의 성과가 끝난 자리에 국민이 받을 청구서만 남겨져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