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유료 애플리케이션 하나가 출판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번역 과정에서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이용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AI 번역 감추는 건 큰 문제…활용 범위·공개 기준 세워야"
29일 업계에 따르면 스마트기기 애플리케이션 ‘책도둑’ 운영사는 번역과정에서 AI를 활용했다고 공지(사진)하고 이용자들이 환불을 요구하면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책도둑은 <어린왕자> <동물농장> <일리아스> 등 저작권이 없는 국내외 730여권의 고전문학 작품을 전자책 형식으로 제공한다. 이용가격은 1만9800원이며 다음달부터 4만9000원으로 오를 예정이다. 현재 앱 다운로드 수는 1000건을 넘어섰다.

책도둑이 구설에 오른 것은 일부 작품들에서 전문 번역가가 작업했다고 보기 어려운 문장과 표현이 발견되면서다. 이용자들의 항의가 잇다르자 결국 운영사는 AI 번역 사실을 밝히게 됐다. 출판계에선 AI 번역을 알리지 않은 책도둑의 행태가 명백한 문제라고 판단한다. 전문 번역가가 작업한 양질의 글을 기대한 이용자를 속이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어느 출판사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등 번역본을 다수 출간했는데 ‘알빠노’(내가 알 바 아니다), ‘머선129’(무슨 일이고),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 등과 같은 인터넷 신조어가 쓰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출판계에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외국서적의 번역 과정에서 AI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 가닥을 잡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AI 활용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인간 번역가가 얼마나 주도적으로 관여해야 하는지에 방점이 찍힌 논의다. 최애영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는 “AI는 번역 과정에서 유능한 비서가 될 수 있지만, 기본적인 판단과 선택은 번역자가 해야 한다”며 “번역가의 해석과 전략 없이 결과물을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문학 번역의 본질과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번 논란이 AI 번역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큰 편이다. 해외 작품이 AI 도움으로 빠르게 국내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국내 작가와 출판사가 활용에 부담을 느끼면 시장 확대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카카오계열 웹소설·웹툰 출판사 KW북스의 권태완 대표는 “웹소설 업계에서 중국은 AI 번역을 거리낌 없이 활용하는 분위기”라며 “해외 콘텐츠가 AI 번역을 통해 빠르게 국내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우리만 이를 터부시한다면 한국 작품의 해외 진출이 늦어지고 시장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출판계에선 책에 AI 활용 여부를 표시하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도서 출간 시 AI 활용 여부를 명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한 대학에 관련 연구용역을 맡겼다. 오는 8~9월에는 AI 시대의 출판을 주제로 두 번째 포럼을 열고, AI 활용 원칙을 담은 헌장을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