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시장이라는 복잡계, 그 안의 정부
지난해 하반기 우리 경제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환율이었다. 최대 연 200억달러의 대미 투자 계획이 발표된 후였다. 원·달러 환율이 속절없이 뛰었다. 정부는 고환율의 주범으로 국민연금과 서학개미를 지목했다. 당국의 압박에 국민연금은 올해 초 결국 해외 투자의 속도를 줄였고, 주가가 올라도 리밸런싱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국내 주식 비중을 높였다. 물론 주가 부양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환율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난 2월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자 당국에서 환율 얘기가 쏙 들어갔다. 불확실성에 환율이 더 올랐는데도 그랬다. 주범이 국민연금과 서학개미에서 전쟁으로 옮겨간 ‘덕분’이었다. 대외 요인이라는 핑계가 생기자 환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외환당국 관계자들의 표정에서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환율이 달러당 1500원 선을 테스트해도 개입에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소용도 없는데 외환보유액만 낭비한다는 논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이 국내 주식이 급등했다. 글로벌 반도체주 랠리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가가 치솟았다. 그런데 환율이 함께 뛰었다. 역대급 수출과 경상수지 흑자 소식에도 달러당 1500원을 훌쩍 넘겼다. 포트폴리오 내 한국 주식 비중이 너무 높아진 외국인이 리밸런싱을 위해 대규모 주식 순매도에 나선 탓이었다.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유예는 개미투자자의 포모(FOMO)와 함께 외국인이 마음 놓고 차익을 실현할 환경을 조성했다. 당국 안팎에서 “주가가 충분히 빠져야 환율이 안정될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5월 말엔 금융당국이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을 도입했다. 금융상품을 다양화해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취지였지만 속내엔 환율이 있었다. 운용사들을 닦달해 상품 출시 속도전을 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됐다. 의도한 대로 서학개미가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도체 고점 우려가 퍼진 상황에서 레버리지 상품은 변동성을 증폭시켰다. 투자심리가 위축됐고 주가가 저평가 구간에 접어들자 외국인의 순매도세가 잦아들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환율 안정으로 이어졌다.

환율은 예상하지 못한 계기로 방향을 바꿨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이었다. 미국 증시에서 조달한 수십조원대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자 환율이 하락 반전했다. 원화 가치가 저점을 찍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수출 기업들도 쥐고 있던 달러를 본격적으로 환전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고환율 수혜로 벌어들인 달러다. ‘원화 약세→가격경쟁력 개선→수출 증가→경상수지 흑자→달러 유입→환율 안정’이라는 자기 조정 메커니즘이 모처럼 작동하고 있다.

지난 수개월간 한국 외환시장과 증시에서 벌어진 일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할 만하다. 시장은 복잡계다. 하나의 변수가 복잡하게 연결된 다른 변수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누구도 알기 어렵다. 수많은 시장 참가자가 상호 작용하며 새로운 균형을 찾아간다. 이 거대한 생태계에선 정부 정책도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그래서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정부의 믿음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불렀다.

정부 내에서 무언가를 장담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고위 공직자의 지나친 확신은 설익고 무리한 정책을 낳는다. 가격은 시장이 보내는 신호다. 가격이 목표가 되면 시장은 예외 없이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정부가 할 일은 일관된 원칙으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부동산도, 산업 정책도 마찬가지다. 손을 놓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시장 앞에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