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충남의 한 금속 용기 제조업체가 정부 포털(고용24)에 비전문취업(E-9 비자) 외국인 채용 공고를 올리자 며칠 뒤 30대 베트남 여성 브로커가 회사를 찾아왔다. 이 브로커는 유창한 한국말로 베트남 출신 취업 희망자 네 명을 회사에 소개했다. 현행 고용허가제는 인력 송출 비리와 불법 체류를 막기 위해 민간의 이런 취업 알선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베트남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출신 브로커도 다녀갔다”며 “요즘 고용허가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26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외국인 근로자 선발과 알선을 담당하는 E-9 근로자 채용 시장에도 브로커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당장 일손이 급한데 외국인을 배정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채용한 외국인은 월급을 단돈 1만원이라도 더 주는 기업으로 옮기려고 안달한다”며 “브로커들이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고 했다. 농어촌 일손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계절노동자(E-8 비자) 취업 시장에선 이미 브로커 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가 110만 명을 넘어서면서 정부의 외국인 고용 관리 체계가 통제력을 잃고 산업 현장 수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이동 제한을 완화하는 내용의 고용허가제 개편안이 시행되면 기업 현장의 혼란은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고용노동부는 인권 강화를 명분으로 E-9 외국인 근로자의 최초 근무 기간 기준을 3년에서 1~2년으로 낮추고, 지역 제한도 일부 풀어주는 방안을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논의할 계획이다. 김기훈 중소기업중앙회 외국인력지원실장은 “사업장 변경 기준이 완화되면 브로커가 더 날뛰게 되고 이직이 활발해지면서 숙련인력이 대거 빠져나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광석 인하대 다문화정책학과 교수는 “인권도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 산업 구조에서 사업장 변경 기준을 성급하게 풀면 지방이나 3D 업종에선 공동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외국인 노동정책 전반을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불법 브로커 판치는데 이직 문턱 낮춘다…"지방 제조업 초토화" 사람 급한 중기·이직 원한 노동자…브로커가 불법 알선해 수백 챙겨
경기 남부 금속가공업체의 외국인 근로자 채용 담당 직원은 최근 이런 문자를 받았다. 발신자는 070 국번을 사용하는 외국인 채용 플랫폼 ‘잡***’. 전화로 문의하니 “E-9은 고용노동부를 거치는 게 원칙”이라면서도 “이직을 원하는 외국인이 워낙 많이 가입해 일손이 필요한 기업에 알선해주고 있다”고 해명했다.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고용허가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노동부를 거치지 않고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근로자(E-9 비자)를 특정 기업에 지정 알선하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진화하는 브로커…불법체류자도 알선
26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한국어가 유창한 귀화인과 행정사 등이 E-9 근로자 채용 알선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일부 온라인 채용 플랫폼에서도 E-9 근로자의 사업장 이직이 발생하고 있다. 브로커 수수료는 양호한 사업장으로 이직이 성사될 경우 많게는 2~3개월치 월급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 아산의 한 판금 가공업체 관계자는 “E-9 근로자를 영구체류 비자(E-7)로 전환해준 사례가 알려지자 채용을 알선하는 온라인 플랫폼과 브로커의 연락이 자주 온다”고 했다.
외국인 이직 과정에서 고용노동부 허가를 받기 위한 브로커의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 사전에 조율한 기업이 공공 고용서비스 플랫폼인 ‘고용24’에 키, 몸무게 등 외국인의 신체적 특징을 지정해 구인을 신청한다. 일부 외국인은 원하는 기업이 추천될 때까지 고용노동부가 알선하는 사업장을 건너뛴다.
인력난이 심한 지방에서는 불법체류자를 소개하는 인력파견업체가 성행한다. 경북의 한 식품 제조사는 일당 16만원씩 주면서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불법체류자 10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는 “내국인 수에 따라 외국인 고용 한도가 정해져 있는데, 이 시골에 오는 한국인이 어디 있느냐”며 “불법체류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은 위험 요인이 커 한국인보다 급여가 20~30% 더 높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외국인 이직 완화, 중소 제조업 붕괴”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사업장 변경’ 기준 개선안이 확정되면 지역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심화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현행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E-9 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은 최초 사업장에서 3년간 근무해야 한다. 휴·폐업, 부당한 처우 등의 사유가 발생하면 3회에 걸쳐 이직할 수 있다. 사업장을 변경하더라도 사업장이 속한 권역 안에서 옮겨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인권 강화를 명분으로 최초 근무 기간 기준을 3년에서 1~2년으로 낮추고 지역 제한도 일부 풀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구의 한 자동차부품업체 관계자는 “사업장 변경 완화 소식이 알려지자 외국인 근로자의 엉덩이가 들썩이고 있다”고 전했다.
충남 아산 금속가공 공장에서 작업 중인 외국인 노동자. 이정선 중기선임기자
법무부에 따르면 전체 국내 체류 외국인 110만 명 중 E-9 비자 소지자가 32만1000명(28.9%)으로 가장 많다. 이 중 80% 정도가 중소 제조업에서 근무한다. 중소기업계는 사업장 변경 기준 완화 방침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인천의 한 표면처리업체 대표는 “한국어가 서투르고 기술도 없어 1년은 가르쳐야 제 몫을 하는데 조기에 사업장을 옮기도록 하면 처음 외국인을 데리고 온 기업만 바보가 된다”며 “3D 뿌리기업이나 지방 제조업에 어떤 외국인이 남아 있으려고 하겠느냐”고 걱정했다.
전남 여수의 한 식품제조업체 대표는 “지금도 외국인이 태업을 일삼으며 이직하겠다는 걸 말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사업장 변경 기준마저 완화하면 지방의 중소 제조업은 인력난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외국인 정책의 핵심을 ‘이동 자유 확대’보다 ‘안정적 정착 유도’에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광석 인하대 다문화정책학과 교수는 “E-9 외국인이 가족과 거주할 수 있게 하면 인권 문제가 일부 해소되고 이직 동기도 반감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