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사회적 대화 복귀를 공식 추진한다.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지 27년 만이다. 인공지능(AI)발 산업 대전환 과정에 노동계 전체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초과세수 활용 방안과 정부의 메가 프로젝트 등은 조합원 이익과 밀접히 연관돼 있어 민주노총이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은 23일 서울 정동 회의실에서 제9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사회적 교섭 논의 건’을 주요 안건으로 상정했다. 민주노총은 현행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체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 대신 경사노위의 명칭과 의결 구조를 전면 개편한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정부에 제안한다는 방침이다. 의사결정 방식도 다수결 중심이 아니라 충분한 숙의와 토론을 보장하는 합의제로 바꾸고, 기업별 노조 대신 산별 노조가 참여하는 구조를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민주노총 관계자는 “안건 토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사노위 참여 방안이 논의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노사정위 탈퇴 27년 만에…새 협의체 제안 정부도 대화 참여 유도 적극적…새 교섭기구 수용 여부가 변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최근 들어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겠다는 신호를 강하게 보내고 있다. 1999년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탈퇴 이후 가장 적극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민주노총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출범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지만, 이듬해 2월 정부의 정리해고제 도입 등에 반발하며 탈퇴했다. 이후 27년 동안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에는 당시 김명환 위원장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에 참여해 사회적 대화 복귀를 타진했다. 하지만 거센 내부 반발에 합의안이 대의원대회에서 최종 부결됐고, 김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 “친노동 정책 결정에 존재감 필요”
이번 입장 선회는 민주노총을 둘러싼 정책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민주노총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해왔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노동 존중 정부’ 출범으로 노동 정책을 둘러싼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는데, 정작 핵심 정책 결정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졌다.
특히 민주노총이 지난해 경사노위를 ‘패싱’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회 사회적 대화’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민주노총의 ‘초조감’이 극대화됐다.
여기에 최근 정부가 반도체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해 반도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로 구성된 ‘3대 메가 프로젝트’에 향후 10년간 1500조원 이상을 투입하는 계획을 밀어붙이면서 정책 설계 단계부터 민주노총이 개입해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메가특구 전문인력의 주 52시간 규제 면제, 로봇 도입에 따른 일자리 대체 등 노동 관련 의제도 산적해 있다. 대정부 투쟁과 총파업을 중심으로 존재감을 드러내 온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링 위에 올라 ‘정책 투쟁’을 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23일 중앙집행위원회 안건 자료에서 “최근 반도체 특수로 생긴 특정 기업의 엄청난 초과이윤, 정부의 초과세수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가는 향후 수십 년간 한국 사회와 노동 현장을 규정하게 될 것”이라며 참여 당위성을 밝혔다.
◇ 새 사회적 교섭 기구, 받아들여질까
정부도 노정 대화의 폭을 넓히면서 민주노총 끌어안기에 나섰다. 보건복지부와 기후에너지환경부 등 일부 정부 부처는 이미 민주노총과 노정 협의를 하고 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오는 28일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간담회를 할 예정이다.
정부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기구 개편 요구를 수용할지가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민주노총은 현 경사노위는 정부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며 경사노위로의 복귀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 대신 산별 노조의 참여가 보장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교섭 기구를 제안하기로 했다.
사회적 대화 참여 안건이 대의원대회에서 추인받을 수 있을지도 변수다. 노동계 관계자는 “2020년 사회적 대화 참여 좌초를 주도한 정파가 양경수 위원장이 소속된 ‘전국회의’인 만큼 6년 만의 입장 선회와 관련해 내부 설득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의 복귀가 현실화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대화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양대노총의 조직률이 약 13%에 불과해 대표성이 떨어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경제계는 특히 상대적으로 강성인 민주노총이 목소리를 높일 경우 ‘고용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경영계의 목소리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26년간 경사노위 테이블에서 사실상 ‘유일한 노동계 대표’ 지위를 누려온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다.
노동계 관계자는 “민주노총이 앞세운 원·하청 교섭 등의 의제는 이미 법제화까지 완료돼 현장에서 작동 중이지만, 한국노총의 숙원인 정년 연장 등은 지연되는 형국”이라며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복귀를 계기로 대화 테이블의 무게중심이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 쪽으로 옮겨가면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