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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위 판잣집·일터가 된 부두…부산이 쓴 '生의 기적'
Cover Story
과거를 구하라…미래가 열린다
부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키워드는 '헤리티지 시프트'
과거를 구하라…미래가 열린다
부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키워드는 '헤리티지 시프트'
문화유산은 오랫동안 박물관 유리창 너머에 박제된, 고리타분한 ‘옛날 물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 모뉴먼츠맨이 전쟁 중에도 목숨을 걸었듯 문화유산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인류가 많은 시련과 비극에 맞서 곳곳에서 지켜낸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다.
우리는 문화유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성당부터 기후 위기로 녹아내리는 사하라의 진흙 도시,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으로 침하하고 있는 마추픽추까지. 위대한 유산은 오늘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찬란한 과거를 지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 현대판 ‘모뉴먼츠맨’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전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전쟁기 부산의 유산들
폐허 속에서 피란민 품은 경험…인류 보편적 유산될 가치 충분
부산 아미동의 한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래된 집의 담벼락과 계단, 주춧돌 사이로 생경한 돌이 눈에 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식 이름과 한자가 새겨져 있다. 6·25전쟁 때 피란민이 일본인 공동묘지의 석축 위에 지은 판잣집, 바로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의 풍경이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조성된 이 공동묘지는 1945년 일본 패전으로 일본인이 떠난 뒤 방치돼 있었다.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밀집한 부산의 절박함을 반영하듯, 일본인 묘지 위에 목구조로 세운 임시건축물은 현재까지 원형 훼손 없이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말 그대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두 주거지를 포함해 6·25전쟁 당시 1023일간 임시수도로 기능한 부산 곳곳의 11개 지역 및 공간은 현재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한국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이후 1995년 ‘석굴암’ ‘불국사’를 시작으로 지난해 등재된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모두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선사·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중심이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아직 없다.
부산은 이 ‘첫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데 이어 2025년 11월 국가유산청의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면서 등재 절차가 본격화됐다. 부산시는 2030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 유산은 궁궐, 사찰 같은 전통적인 기념물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비상상황 속에서 정부와 시민, 피란민이 함께 만들어낸 ‘생존과 생활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기존 국내의 다른 유산과 결이 다르다. 마침 오는 29일까지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리면서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역시 세계인이 주목하는 유산으로 부상하고 있다.
세월의 아픔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지만, 전쟁의 상흔을 내세워 동정과 연민에만 기대지 않는다. 부산은 전쟁 속에서도 마을을 일구고 정부 기능을 유지해 왔다. 또 유엔 참전과 국제 구호를 통해 위기에 대응한 만큼 피란민과 시민의 역동성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세계유산 등재 기준)로 제시하는 게 목표다.
경무대는 피란수도 시기 정부 기능이 살아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전쟁 중 대통령 관저로 쓰인 것은 물론 주요 정책 결정과 유엔 주요 인사와의 면담 등 외교활동도 이뤄졌다. 현재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평범한 근대 건축처럼 보이는 부산근현대역사관도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해방 뒤 미국공보원으로 쓰였고, 6·25전쟁 발발 뒤에는 미국대사관이 들어섰다. 한국과 미국의 정부, 유엔과 세계 각국을 잇는 외교·원조의 창구인 셈이다.
11곳을 하나의 지도 위에 올려놓으면 한 도시의 전쟁사가 여실히 그려진다. 부산의 도전이 성공하면 한국의 세계유산 범위는 수백~수천 년 전의 역사에서 불과 70여 년 전의 ‘살아 있는 근현대사’로 확장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가 기능을 유지하고 수백만 명의 피란민을 품은 도시 부산의 경험을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유산으로 인정받겠다는 것이 이번 등재 추진의 핵심이다.
피란수도 부산은 세계유산 등재 기준 가운데 3번(문화전통·문명의 증거)과 6번(중요한 사건·사상 관련 유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우슈비츠’와 ‘킬링필드’처럼 20세기의 아픈 기억을 담은 장소도 기준 6번에 근거해 등재됐다.
정소람/안혜원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