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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위 판잣집·일터가 된 부두…부산이 쓴 '生의 기적'
Cover Story
과거를 구하라…미래가 열린다
부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키워드는 '헤리티지 시프트'
과거를 구하라…미래가 열린다
부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키워드는 '헤리티지 시프트'
문화유산은 오랫동안 박물관 유리창 너머에 박제된, 고리타분한 ‘옛날 물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 모뉴먼츠맨이 전쟁 중에도 목숨을 걸었듯 문화유산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인류가 많은 시련과 비극에 맞서 곳곳에서 지켜낸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다.
최근 세계의 시선이 부산으로 쏠리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이번주 부산에서 개막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키워드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헤리티지 시프트’다. 전쟁과 기후 위기로 많은 유산이 소멸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를 지켜내야 할 유네스코는 미국이 탈퇴한 이후 극심한 기금 고갈을 겪고 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지드래곤이 이번 행사에서 글로벌 앰배서더로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최근 자신이 설립한 저스피스재단과 함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시민 모금 캠페인 ‘헤리티지 인 피스’를 시작했다. “유산을 지키는 일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며 미래의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피란 수도이던 도시의 서사를 국내 최초의 근현대 세계유산(2030년 목표)으로 올려놓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문화유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성당부터 기후 위기로 녹아내리는 사하라의 진흙 도시,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으로 침하하고 있는 마추픽추까지. 위대한 유산은 오늘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찬란한 과거를 지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 현대판 ‘모뉴먼츠맨’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전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전쟁기 부산의 유산들
폐허 속에서 피란민 품은 경험…인류 보편적 유산될 가치 충분
부산 아미동의 한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래된 집의 담벼락과 계단, 주춧돌 사이로 생경한 돌이 눈에 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식 이름과 한자가 새겨져 있다. 6·25전쟁 때 피란민이 일본인 공동묘지의 석축 위에 지은 판잣집, 바로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의 풍경이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조성된 이 공동묘지는 1945년 일본 패전으로 일본인이 떠난 뒤 방치돼 있었다.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밀집한 부산의 절박함을 반영하듯, 일본인 묘지 위에 목구조로 세운 임시건축물은 현재까지 원형 훼손 없이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말 그대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두 주거지를 포함해 6·25전쟁 당시 1023일간 임시수도로 기능한 부산 곳곳의 11개 지역 및 공간은 현재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한국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이후 1995년 ‘석굴암’ ‘불국사’를 시작으로 지난해 등재된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모두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선사·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중심이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아직 없다.
세월의 아픔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지만, 전쟁의 상흔을 내세워 동정과 연민에만 기대지 않는다. 부산은 전쟁 속에서도 마을을 일구고 정부 기능을 유지해 왔다. 또 유엔 참전과 국제 구호를 통해 위기에 대응한 만큼 피란민과 시민의 역동성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세계유산 등재 기준)로 제시하는 게 목표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던 곳도 있다. 부산항 제1부두는 전쟁물자와 구호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자 피란민이 하루 벌이를 하던 일터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부두 하역과 막노동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수도시설인 복병산 배수지는 전쟁 당시엔 물을 공급하며 도시의 생명줄이 돼준 장소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양동이와 물동이를 들고 줄을 섰다. 임시중앙청, 영도다리 등도 각각 행정·통치 기능과 생활 기반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피란수도 부산은 세계유산 등재 기준 가운데 3번(문화전통·문명의 증거)과 6번(중요한 사건·사상 관련 유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우슈비츠’와 ‘킬링필드’처럼 20세기의 아픈 기억을 담은 장소도 기준 6번에 근거해 등재됐다.
정소람/안혜원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