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 전쟁으로 피해를 본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구세주 변모 대성당’.  ⓒ위키피디아

(오른쪽 사진) 흙으로 빚어 올린 말리의 젠네 고대 도시는 기후 변화로 위협받고 있다.  ⓒ유네스코
(왼쪽 사진) 전쟁으로 피해를 본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구세주 변모 대성당’. ⓒ위키피디아 (오른쪽 사진) 흙으로 빚어 올린 말리의 젠네 고대 도시는 기후 변화로 위협받고 있다. ⓒ유네스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문명의 조각들이 조용히 바스러지고 있다. 전쟁의 벼랑 끝에서 흩어지는 고대의 기억부터, 뜨거워진 지구가 녹여버린 500년 흙의 성채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갉아먹은 원시의 숨결까지. 시간 속에 멈춰 있는 것으로 알았던 세계의 귀한 유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뒤늦게서야 이들을 돌아본다면, 지상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들을 들여다봤다.

전쟁이 삼켜버린 역사지구

지금도 사라지고 있다…벼랑 끝에 선 인류의 보물
유네스코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유산은 총 56개다. 그중 하나가 푸른 흑해의 물결을 품은 우크라이나 항구 도시 오데사다. 이 도시는 오랜 세월 ‘시인과 예술가들의 안식처’로 불렸다. 특히 19세기 지중해의 우아함과 비잔틴의 웅장함이 교차하는 구시가지는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수 세기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문명의 박물관’으로 꼽혔다.

최근 몇 년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에 포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도시의 상징이자 1809년 건립돼 시민들의 오랜 안식처가 돼준 ‘구세주 변모 대성당’은 한순간에 지붕이 뚫렸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모자이크 벽화의 일부도 가루로 흩어졌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데사 시민과 현지 유산 관리자들은 미사일 경보음이 울리는 현장에서 유물 하나하나를 비닐로 감쌌다. 석조 동상과 성당 기둥 주변에는 수많은 모래주머니가 사람 키를 넘어서도록 높게 쌓였다. 지워져 가는 도시의 정체성을 인간의 손으로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2500년 전 흙과 석회로 쌓아 올린 예멘 사나의 고대 도시도 내전으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황토색 진흙 벽면에 석회로 그려 넣은 화려하고 기하학적인 띠 장식이 매력적인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의 마천루’로 불렸다. 그러나 최근까지 이어진 포격과 관리 부재 속에서 지붕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다.

기후 변화가 유산의 위기로

하루 수천 명이 찾는 페루 마추픽추는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마추픽추관광청
하루 수천 명이 찾는 페루 마추픽추는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마추픽추관광청
글로벌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유산도 많다. 사하라 사막 남단, 거대한 황토색 진흙으로 지어 올린 말리의 젠네 고대 도시는 인간이 흙으로 빚어 올린 곳이다. 콘크리트 하나 없이, 오직 강가의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사원과 집은 마치 땅에서 자라난 생명체처럼 부드러운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고대 도시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열고, 진흙을 다져 벽을 덧바르며 유산을 지켜왔다.

그러나 기온이 가파르게 올라가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수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바짝 말라 균열이 간 진흙 벽체 위로, 돌발성 폭우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5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진흙 벽돌 중 상당수가 빗물에 흘러내렸다. 제대로 개발조차 된 적 없는 아프리카의 도시가, 화석연료 사용 여파로 무너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안데스산맥 너머 남미의 사막도 마찬가지다. 잉카 이전의 대제국 치무 문명이 사막 한가운데 세운 ‘찬찬 유적’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기후 덕분에 오랫동안 거대한 진흙 성벽과 기하학적인 새, 물고기 조각의 원형 등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하지만 이상 기후가 몰고 온 엘니뇨 폭우로 정교한 조각의 형태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상 기후가 고대인이 쌓아 올린 경이로운 시간의 흔적을 곳곳에서 천천히 지워가고 있다.

과잉 개발·관광이 부른 재앙

난개발로 파괴되고 있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열대우림.   ⓒ유네스코
난개발로 파괴되고 있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열대우림. ⓒ유네스코
과도한 지역 개발과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이 파괴하고 있는 유산도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열대우림은 오랑우탄과 호랑이가 숨 쉬던 지구의 원시적 허파다. 그러나 디저트와 라면,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팜유를 얻기 위해 대형 불도저가 이 지역의 숲에 들어섰다. 불법 벌목과 팜유 농장 개간이 이뤄지면서 수마트라의 원시림은 난도질당했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페루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도 어려움에 직면했다. 해발 2430m, 구름이 걸쳐 있는 신비로운 석조 도시는 보존해야 할 유산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으나, 역설적으로 유명해진 탓에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어 위기에 처했다. 지역 난개발과 사람들의 과도한 발길 아래 안데스의 바위 지반이 균열을 일으키고, 석조 구조물은 미세하게 침하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마추픽추를 위험에 처한 유산으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전 단계인 ‘소멸 위기 경고 및 집중 관찰 유산’으로 지정한 상태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