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도카이도 길 전경. 건물들은 새롭게 지어졌지만 길의 너비와 방향, 위치는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 사진. ©김성우
비가 온 도카이도 길 전경. 건물들은 새롭게 지어졌지만 길의 너비와 방향, 위치는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 사진. ©김성우
오래된 건물의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이 가도 위에 조용히 떨어진다. 우산을 들고 걷는 이 길은 에도 시대 일본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옛길, '도카이도(東海道)'다. ‘도카이도’는 에도(현재의 도쿄)와 교토를 잇는 약 500km의 해안길의 이름이다. 수백 년 전 에도와 교토를 오고 가던 사람들도 거센 바닷바람과 비를 맞으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에도 막부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이 길 위에 53개의 역참(슈쿠바, 여행객이 쉬어가는 마을)을 두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도카이도 53차(東海道五十三次)’라 부른다. 이 길 위로는 각지의 영주(다이묘)들이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에도를 오가던 참근교대 행렬이 줄을 이었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이세 신궁 참배를 위해 나선 평범한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옛 유이슈쿠의 최고급 객관이었던 '본진(本陣)' 터에 조성된 공원 입구. 다이묘나 조선통신사 같은 귀빈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현재는 도카이도 히로시게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 사진. ©김성우
옛 유이슈쿠의 최고급 객관이었던 '본진(本陣)' 터에 조성된 공원 입구. 다이묘나 조선통신사 같은 귀빈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현재는 도카이도 히로시게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 사진. ©김성우
무엇보다 도카이도는 한일 양국의 외교와 문화가 교류하던 핵심 경로였다. 임진왜란 이후 관계 회복을 위해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 사절단 역시 막부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이 길을 따라 에도로 향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조선의 문인과 관료들이 도카이도를 지날 때면, 그들의 선진 학문과 문물을 한눈이라도 보기 위해 주변 지역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도카이도는 단순한 교통로가 아니라 당대의 정치와 경제, 동아시아의 외교가 교차하던 역사적 무대였다.

시즈오카, 도카이도 역참의 절반을 품은 지리적 서사

이 기나긴 여정의 한가운데에 시즈오카(옛 스루가국)가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도카이도의 중심인 시즈오카현 구간은 전체 53개 역참 중 무려 22개를 품고 있다. 옛 여행객들이 여정의 가장 오랜 시간을 시즈오카의 흙을 밟으며 보냈음을 뜻한다.
에도 시대 유이슈쿠의 옛 모습을 정교하게 복원한 미니어처 모형. 도카이도를 걷던 수많은 나그네가 북적였을 당시 역참 마을의 활기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사진. ©김성우
에도 시대 유이슈쿠의 옛 모습을 정교하게 복원한 미니어처 모형. 도카이도를 걷던 수많은 나그네가 북적였을 당시 역참 마을의 활기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사진. ©김성우
시즈오카가 이토록 촘촘한 역참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적 인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다. 에도 막부를 연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를 물려준 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시즈오카의 슨푸성으로 물러나 머물렀다. 사실상 막부의 또 다른 중심지였던 셈이다. 그 결과 시즈오카 구간의 도카이도는 막부의 철저한 관리 아래 안전하게 정비되었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보루 역할을 수행했다.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한쪽에는 후지산을 두고, 다른 한쪽으로는 스루가 만의 파도를 보며 걷는 이 길은 당대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키요에(목판화)의 거장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남긴 연작에 시즈오카의 풍경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지역이 가진 독특한 지리적 서사 때문이다.
시즈오카시 도카이도 히로시게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차'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유이: 삿타 고개'를 목공예 기법인 요세기자이쿠(나무 모자이크공예)로 재현한 작품 / 사진. ©김성우
시즈오카시 도카이도 히로시게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차'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유이: 삿타 고개'를 목공예 기법인 요세기자이쿠(나무 모자이크공예)로 재현한 작품 / 사진. ©김성우

유이슈쿠(由比宿)의 옛 거리에서 만난 푸른 노렌

한참을 걷다 보니 옛 도카이도의 16번째 역참인 유이슈쿠(由比宿)에 접어들었다. 폭이 좁은 옛길 양옆으로 전통 가옥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어깨를 맞대고 있다. 비에 적당히 젖어 묵직한 색을 띠는 흑색 판자 벽들을 보며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조용한 정취에 사로잡힌다.
비가 내리는 유이슈쿠의 옛길 전경. 도카이도에 있는 어느 한 집의 검은 목조 담장과 오래된 소나무가 어우러져 옛 역참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한다. / 사진. ©김성우
비가 내리는 유이슈쿠의 옛길 전경. 도카이도에 있는 어느 한 집의 검은 목조 담장과 오래된 소나무가 어우러져 옛 역참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한다. / 사진. ©김성우
그 조용한 길목에 선명한 푸른색 노렌(천 가림막)이 걸려 있다. 하얀 글씨로 정갈하게 적힌 '正雪(쇼세츠)'. 1912년(다이쇼 원년) 창업 이래 오직 한자리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술을 빚어온 신자와가와 주조장(神沢川酒造場)이다. 도카이도를 오가던 나그네들의 목을 축여주었을 이 지역의 맑은 물이, 오늘날 시즈오카를 대표하는 니혼슈로 이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신자와가와 주조장 입구에 걸린 푸른 노렌. '쇼세츠(正雪)'라는 글귀가 단정한 인상을 준다. / 사진. ©김성우
신자와가와 주조장 입구에 걸린 푸른 노렌. '쇼세츠(正雪)'라는 글귀가 단정한 인상을 준다. / 사진. ©김성우

빛바랜 상장과 올곧은 이름에 담긴 철학

신자와가와 양조장 건물의 외부 모습 / 사진. ©김성우
신자와가와 양조장 건물의 외부 모습 / 사진. ©김성우
다다미가 깔린 주조장 안쪽 응접실로 들어서자 차분한 공기가 감돌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빛바랜 상장들이 양조장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품질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었다.
응접실 내부 전경. 벽면 가득 걸린 각종 전국 신술 품평회의 금상 상장들이 양조장의 오랜 역사와 신뢰를 증명한다. / 사진. ©김성우
응접실 내부 전경. 벽면 가득 걸린 각종 전국 신술 품평회의 금상 상장들이 양조장의 오랜 역사와 신뢰를 증명한다. / 사진. ©김성우
마주 앉은 양조장의 구라모토 모치즈키 마사타카는 준비해 온 모니터를 통해 '쇼세츠'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설명했다. 화면 속 장인들이 쌀을 씻고 누룩을 빚는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묵묵하고 고된 수작업의 연속이었다.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제조 공정과 전통 양조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는 양조장 의 구라모토 모치즈키 마사타카 / 사진. ©김성우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제조 공정과 전통 양조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는 양조장 의 구라모토 모치즈키 마사타카 / 사진. ©김성우
이 양조장의 대표 브랜드인 '쇼세츠'라는 이름은 이 지역 출신의 병학자 유이 쇼세츠(由比正雪)에서 가져왔다. 그는 에도 시대 초기, 막부의 통치 방식에 반기를 들었던 역사적 인물이다. 비록 주류 역사에서는 실패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유이 지역 주민들에게 그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인물로 기억된다.

본래 산간에서 임업을 하던 가문이 양조장을 열며 그의 이름을 가져온 것은 그 강직함을 술을 빚는 태도로 삼겠다는 다짐이었다. 타협하지 않고, 유행에 흔들리지 않으며, 정직하게 맑은 술을 빚겠다는 양조장의 고집이 '쇼세츠'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는 셈이다.
양조장 이름의 유래가 된 병학자 '유이 쇼세츠'의 생가 터 안내판. 그는 막부에 반기를 든 인물이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굴복하지 않은 기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사진. ©김성우
양조장 이름의 유래가 된 병학자 '유이 쇼세츠'의 생가 터 안내판. 그는 막부에 반기를 든 인물이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굴복하지 않은 기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사진. ©김성우

정원의 빗소리와 낡은 기계가 말해주는 시간의 무게

"양조장 내부와 정원도 한번 둘러보시지요." 안내를 받아 복도를 지나자 비에 촉촉하게 젖은 중정(中庭)이 나타났다. 바위 위로 초록색 이끼가 짙게 덮여 있고,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 빗방울을 머금고 서 있었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외에는 별다른 소음이 없는, 고요하고 정결한 공간이었다.
주조장 내부에 자리한 고즈넉한 정원. 이끼 낀 바위와 비에 젖은 나무들이 술이 익어가는 차분하고 깨끗한 환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 사진. ©김성우
주조장 내부에 자리한 고즈넉한 정원. 이끼 낀 바위와 비에 젖은 나무들이 술이 익어가는 차분하고 깨끗한 환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 사진. ©김성우
술의 영혼을 결정하는 물은 양조장 바로 옆을 흐르는 하천인 '신자와가와(神沢川)'의 복류수를 사용한다. 미네랄 함량이 낮고 질감이 부드러운 전형적인 연수다. 연수로 술을 빚으면 발효가 완만하고 섬세하게 진행되어, 완성된 술 역시 입안에 머금었을 때 자극 없이 온화한 질감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시즈오카현이 독자 개발한 효모를 더해 저온에서 천천히 술을 익힌다.

발효실을 지나 병을 씻고 담는 작업장 쪽으로 향하자 투박한 철제 기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래된 자동 세병기(병을 씻는 기계)다.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지만, 여전히 제 몫을 다하며 병을 깨끗이 닦아내고 있었다. 모든 공정이 최신식으로 규격화된 대형 공장과는 다른, 사람의 손길과 켜켜이 쌓인 시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작업장 한편에서 묵묵히 가동 중인 오래된 자동 세병기. 대를 이어 전통 방식을 고수해 온 양조장의 생생한 풍경이다. / 사진. ©김성우
작업장 한편에서 묵묵히 가동 중인 오래된 자동 세병기. 대를 이어 전통 방식을 고수해 온 양조장의 생생한 풍경이다. / 사진. ©김성우

스루가 만의 보석, '사쿠라 에비'와의 담백한 조화

신자와가와 주조장이 지향하는 맛의 종착지는 명료하다. 바로 "몇 잔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술"이다. 향이 지나치게 짙거나 단맛이 강하면 첫 입에는 맛있게 느껴져도 이내 물리게 마련이다. 쇼세츠는 멜론이나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옅은 과실 향을 띠면서도 단맛과 산미가 튀지 않아 입안에서 부드럽게 감긴다.

이 담백한 술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려면 이 지역의 명물인 '사쿠라 에비(벚꽃새우)'를 빼놓을 수 없다. 사쿠라 에비는 일본 전국을 통틀어 오직 이곳 시즈오카 앞바다, 스루가 만에서만 잡히는 귀한 식재료다. 심해에 서식하며 어두운 바닷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흔히 '바다의 보석'이라 불린다.

흥미로운 점은 자원 보호를 위해 봄과 가을, 1년에 딱 두 번만 조업이 허락된다는 사실이다. 어획 시기가 되면 유이 항구 둔치에 수많은 분홍빛 새우를 널어 말리는데 맑은 날 후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붉은 양탄자 같은 풍경은 유이 지역을 상징하는 진풍경으로 꼽힌다.

식탁 위에서 쇼세츠는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기보다 이 귀한 식재료를 묵묵히 뒷받침한다. 바삭하게 튀겨낸 사쿠라 에비 가키아게(튀김)의 고소한 기름기를 쇼세츠의 깔끔한 산미가 부드럽게 씻어내 주고, 생(生) 사쿠라 에비 특유의 은은한 단맛은 술의 둥근 질감과 어우러져 기분 좋은 감칠맛으로 피어난다. 지역의 맑은 물로 빚은 술과 그 지역 앞바다에서 자란 식재료가 만났을 때 발휘되는 시너지, 지역 양조장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조화다.

옛길에서 마주한 맑은 시간

양조장을 한바퀴 돌고 주조장 문을 나서니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도카이도의 옛길을 계속 적시고 있었다. 과거 이 길을 걷던 사람들도 고된 여정 끝에 한 잔의 술로 지친 몸을 달랬을 것이다. 시즈오카 유이슈쿠의 낡은 가도 한복판에서 만난 신자와가와 주조장. 맑은 연수와 흔들리지 않는 양조 철학으로 빚어낸 이 담백한 술에는 묵묵히 이어져 온 도카이도 옛길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에 기록된 역사 못지않게 한 잔의 술 속에 담긴 시간 역시 깊고 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