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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저항했던 이름으로 술을 빚다…100년을 버틴 양조장 [김성우의 사케 본색]
시즈오카 '쇼세츠'를 가다
에도 막부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이 길 위에 53개의 역참(슈쿠바, 여행객이 쉬어가는 마을)을 두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도카이도 53차(東海道五十三次)’라 부른다. 이 길 위로는 각지의 영주(다이묘)들이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에도를 오가던 참근교대 행렬이 줄을 이었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이세 신궁 참배를 위해 나선 평범한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시즈오카, 도카이도 역참의 절반을 품은 지리적 서사
이 기나긴 여정의 한가운데에 시즈오카(옛 스루가국)가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도카이도의 중심인 시즈오카현 구간은 전체 53개 역참 중 무려 22개를 품고 있다. 옛 여행객들이 여정의 가장 오랜 시간을 시즈오카의 흙을 밟으며 보냈음을 뜻한다.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한쪽에는 후지산을 두고, 다른 한쪽으로는 스루가 만의 파도를 보며 걷는 이 길은 당대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키요에(목판화)의 거장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남긴 연작에 시즈오카의 풍경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지역이 가진 독특한 지리적 서사 때문이다.
유이슈쿠(由比宿)의 옛 거리에서 만난 푸른 노렌
한참을 걷다 보니 옛 도카이도의 16번째 역참인 유이슈쿠(由比宿)에 접어들었다. 폭이 좁은 옛길 양옆으로 전통 가옥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어깨를 맞대고 있다. 비에 적당히 젖어 묵직한 색을 띠는 흑색 판자 벽들을 보며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조용한 정취에 사로잡힌다.
빛바랜 상장과 올곧은 이름에 담긴 철학
본래 산간에서 임업을 하던 가문이 양조장을 열며 그의 이름을 가져온 것은 그 강직함을 술을 빚는 태도로 삼겠다는 다짐이었다. 타협하지 않고, 유행에 흔들리지 않으며, 정직하게 맑은 술을 빚겠다는 양조장의 고집이 '쇼세츠'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는 셈이다.
정원의 빗소리와 낡은 기계가 말해주는 시간의 무게
"양조장 내부와 정원도 한번 둘러보시지요." 안내를 받아 복도를 지나자 비에 촉촉하게 젖은 중정(中庭)이 나타났다. 바위 위로 초록색 이끼가 짙게 덮여 있고,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 빗방울을 머금고 서 있었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외에는 별다른 소음이 없는, 고요하고 정결한 공간이었다.
발효실을 지나 병을 씻고 담는 작업장 쪽으로 향하자 투박한 철제 기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래된 자동 세병기(병을 씻는 기계)다.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지만, 여전히 제 몫을 다하며 병을 깨끗이 닦아내고 있었다. 모든 공정이 최신식으로 규격화된 대형 공장과는 다른, 사람의 손길과 켜켜이 쌓인 시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루가 만의 보석, '사쿠라 에비'와의 담백한 조화
신자와가와 주조장이 지향하는 맛의 종착지는 명료하다. 바로 "몇 잔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술"이다. 향이 지나치게 짙거나 단맛이 강하면 첫 입에는 맛있게 느껴져도 이내 물리게 마련이다. 쇼세츠는 멜론이나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옅은 과실 향을 띠면서도 단맛과 산미가 튀지 않아 입안에서 부드럽게 감긴다.이 담백한 술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려면 이 지역의 명물인 '사쿠라 에비(벚꽃새우)'를 빼놓을 수 없다. 사쿠라 에비는 일본 전국을 통틀어 오직 이곳 시즈오카 앞바다, 스루가 만에서만 잡히는 귀한 식재료다. 심해에 서식하며 어두운 바닷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흔히 '바다의 보석'이라 불린다.
흥미로운 점은 자원 보호를 위해 봄과 가을, 1년에 딱 두 번만 조업이 허락된다는 사실이다. 어획 시기가 되면 유이 항구 둔치에 수많은 분홍빛 새우를 널어 말리는데 맑은 날 후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붉은 양탄자 같은 풍경은 유이 지역을 상징하는 진풍경으로 꼽힌다.
식탁 위에서 쇼세츠는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기보다 이 귀한 식재료를 묵묵히 뒷받침한다. 바삭하게 튀겨낸 사쿠라 에비 가키아게(튀김)의 고소한 기름기를 쇼세츠의 깔끔한 산미가 부드럽게 씻어내 주고, 생(生) 사쿠라 에비 특유의 은은한 단맛은 술의 둥근 질감과 어우러져 기분 좋은 감칠맛으로 피어난다. 지역의 맑은 물로 빚은 술과 그 지역 앞바다에서 자란 식재료가 만났을 때 발휘되는 시너지, 지역 양조장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조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