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 집, 첫인상을 만드는 연못이 그림처럼 어여쁘다(사진=정상미)“날더러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면 ‘도인이 되어 선(禪)의 삼매경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고도 그의 소원은 무한한 세계에서 어린이처럼 천진한 정신과 맑음으로 일생 벗이 되어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했다. 한 예술가의 거처이자 침묵의 세계를 화려한 색채와 필묵으로 치환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집념과 사랑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 '운보의 집'을 여행한다.
1984년 완공한 운보의 집, 본채(사진=정상미)
1921년, 8살의 운보는 승동보통학교 등교 첫날 열린 대운동회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력을 잃고 만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온 것은 그림이었다. 말 대신 선으로, 소리 대신 색으로 세상과 대화하기 시작한 소년은 누구보다 예민한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해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수의 생애로 건너다 본다. 1952~53년 작품 '병자 고치다'(사진=정상미)
예수의 생애 특별관, 작은 예배당처럼 안온하다(사진=정상미)
운보의 작품 세계는 한국화에 뿌리를 둔 채 점점 가지를 뻗어 나갔다. 민화의 해학, 불화의 정신성, 현대적 감각이 뒤섞이며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특히 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 ‘예수의 생애’는 인상적이다.
"운보 김기창의 손끝에서 탄생한 한국의 옷을 입은 예수, 되살아난 세종의 얼굴"
6·25 전쟁 피난길에 완성한 30점(판화)의 작품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예수와 기와집, 외양간, 한국의 산천을 배경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1973년 첫 발행된 만원권 지폐에 사용된 ‘세종대왕 영정’은 운보 김기창의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실존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탄생한 어진은 세종의 위엄과 학자의 깊이를 함께 담아내며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세종대왕’의 표상을 형성했다.
툇마루에서 햇볕을 맡고 있는 화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본채 안도 들어가 볼 수 있다(사진=정상미)
1984년 운보는 아내를 잃은 상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에 새 집을 짓는다. 그가 떠난 뒤 '운보의 집'이 된 이곳은 본채와 안채, 정자와 연못, 야외 조각공원 등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스미고, 그의 대표 작품과 평생에 걸쳐 수집한 기기묘묘한 수석도 걸음을 붙든다.
너른 마당에는 특별한 모양의 수석을 보는 재미도 있다(사진=정상미)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의 작품을 두루 만나는 운보미술관(사진=정상미)
어린 시절 붓을 쥐여준 어머니 한윤명 여사는 예술의 첫 문을 열어준 존재였고, 1946년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 박래현 화백은 평생을 함께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고 지지하며 수많은 부부전을 이어갔다. 우향 박래현은 그가 듣지 못하는 세상의 결을 전해주는 또 하나의 감각이자, 가장 가까운 이해자였다.
거장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안채 공간(사진=정상미)
김기창 화백이 타계할 때까지 머문 안채에는 손때 묻은 가구와 생활은 흔적, 화구가 남아 있다. 거장의 인간적 온기를 품고 뒤돌아 서자 어떤 물음이 메아리친다. 결핍을 통로 삼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 한 예술가가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기꺼이 너를 던지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