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사람은 꽃에 매혹될까.
식물이 나비와 벌을 유혹하고자 만들어낸 것이 꽃이다. 자신의 종(種)을 대지 위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열매나 씨앗, 덩이줄기나 뿌리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지만 꽃은 인간에게 직접 이득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에 강렬하게 이끌린다. 꽃으로 사랑과 축하와 애도를 전하고, 집 주변을 꽃나무로 두른다.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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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변화와 함께 자연은 존재 전체가 변모하는 축제를 겪는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 때 그렇고,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일 때 그렇다. 시각이 아닌 후각의 변용(變容)도 있다. 오월에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달콤한 꿀 냄새를 대기 가득 퍼뜨릴 때가 그렇다.

그러나 자연의 축제 중에서도 으뜸은 산천이 온통 노랗거나 희거나 뽀얀 분홍빛의 봄꽃으로 물들 때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이 위의 시조에서 읊었듯이 무릉도원이 지상에 임하는 순간이다.

이어령은 청년기의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서양어 ‘스프링’ ‘프랭탕’에 대비되는 우리말 ‘봄’의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적한 바 있다. 코 밑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시절 읽은 글이라 정확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지만, “서양 언어에서의 ‘봄’이 생기와 신선함을 나타내는 데 비해,우리말의 ‘봄’이나 한자 춘(春), 일본어 ‘하루’ 등은 꿈꾸는 듯 조는 듯 정적(靜的)인 이미지와 연결돼 있다”라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스프링’도 ‘프랭탕’도 좋지만 ‘봄’ ‘春’도 좋다. ‘스프링’ ‘프랭탕’은 태양의 은총 속에 새로운 행복을 누리는 온갖 사물들을 왠지 한시적인 것으로, 사소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느낌을 준다. 비록 그것이 경쾌하고 신선할지언정. 반면 ‘봄’은 꿈꾸는 듯 조는 듯 하면서도 알 듯 모를 듯 장엄한, 거시적인, 만물이 부풀어 오르는 듯 가슴 벅찬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만 같다.

겨울 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창문. 어느 새엔가 성에는 자취를 감추고,따스한 햇살이 문갑 위에 놓아둔 난초 화분 위에 비스듬히 빛을 던진다.창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아지랑이가 온 대지를 덮고, 나무들은 푸른 새순과 새로 피어난 꽃으로 찬연한 생명의 계절을 준비한다. 장엄하고 상서로운 느낌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듯한 기운, 그것이 ‘봄’ ‘신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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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이은상 시 박태준 곡 사우(思友·동무 생각)

[박태준 ‘동무생각’, 서울모테트합창단]

이은상은 ‘청라언덕 위의 봄의 교향악’을 노래했지만 실제 ‘봄의 교향곡’도 있다.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이다. 개화기 창가 양식이 느껴지는 박태준의 ‘사우’가 상서로운 동양의 봄이라면, 슈만의 ‘봄’ 첫 악장과 끝 악장이 나타내는 약동하는 봄은 그대로 영어 ‘스프링’, 프랑스어 ‘프랭탕’에 대응하는 독일어 ‘프륄링’이다.

[슈만 교향곡 1번 ‘봄’ 4악장]

동양의 ‘春’이 나타내는 꿈같은, 정적인 이미지는 서구인들도 매료시킨 듯하다. 이백 등이 쓴 당시(唐詩)에 매혹된 프랑스인들이 1860년대에 이 시들을 번역 출판했고, 독일인 하인리히 하일만은 이를 독일어로 다시 옮겼다. 한스 베트게가 이를 번안 및 재창작한 시집 ‘중국의 피리’를 1907년 출간했고, 이는 말러의 교향악적 가곡집 또는 가곡집적 교향곡인 ‘대지의 노래’로 음악의 옷을 입었다.

첫 악장 ‘대지의 슬픔에 대한 술노래’는 이백의 비가행(悲歌行)과 연결된다.

“창공은 영원히 푸르고 대지는
오래도록 굳건히 서서 봄에 꽃을 피우리라.
그러나 그대, 인간이여, 대체 얼마나 오래 사는가?
이 세상의 온갖 썩어가는 하찮은 것들을 즐기는 데
백 년도 허락되지 않았거늘!
(중략)
이제 포도주를 들어라! 이제 때가 되었도다, 벗들이여!
황금 잔을 바닥까지 비워라!
어둡도다, 삶이여, 죽음이여!”

다섯 번 째 악장 ‘봄날의 술꾼’은 이백의 ‘춘일취기언지(春日醉起言志·봄날 취한 채 일어나)’가 바탕이 됐다.

“세상을 살아감이 마치 한바탕 큰 꿈 같으니,
어찌하여 이 삶을 힘들게 수고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온종일 취해 있고,
기운 없이 앞마당 기둥에 드러눕노라.
깨어나 뜰 앞을 흘낏 바라보니,
새 한 마리 꽃 사이에서 울고 있구나.
저 새에게 물어보니, 지금이 어느 때냐?
봄바람에 꾀꼬리가 지저귀며 답하네”

글 머리에 소개한 조식의 시조에서 보듯 조선의 문인들도 봄의 정취를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세종~세조 연간의 문신 최한경이 쓴 한시 ‘화원(꽃밭)’이 지어내는 시상은 사뭇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이봉조가 곡을 쓰고 정훈희가 부른 노래 ‘꽃밭에서’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꽃밭 가운데 앉아 어린 꽃잎들을 보니
그 고운 빛깔은 어디서 온 것인가
타오르듯 붉은 꽃, 어찌 그리 농염한가
이런 좋은 날, 이런 좋은 날에
그 사람이 찾아오면 기쁨이 어떠하리”

동양의 정적인 미학을 구현하려는 서양 문인도 있다. 프랑스의 시인 겸 화가 미레이유 페레는 5·7·5 리듬을 가진 짧은 일본시 ‘하이쿠’를 자신의 언어로 녹여냈다. 노란 개나리 꽃잎이 겨울과 봄의 경계를 가르기는 유럽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fin de l'hiver
le jaune du forsythia
dans le vent d'autan
겨울철의 끝
개나리의 노란 빛
동풍 가운데”

이른 봄 개나리와 목련, 벚꽃의 축제는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꽃들은 그만큼이나 화려하고도 아쉽게 작별을 알리고 흩어져 간다. 9세기 일본 시인 기노 도노모리는 이렇게 읊었다.

“이토록 빛이 부드러운 봄날에
어찌하여 벚꽃은 마음 가누지 못하고 지는가”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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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과 같은 시대를 산 비애의 시인 두보(杜甫)는 곡강(曲江) 제1수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빛이 줄어들고
바람에 흩날리는 만 점 꽃잎이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지려는 꽃 눈앞으로 지나가는 것이나 보자꾸나
시름이 깊어도 술이 입술을 적시는 걸 마다 말게”

서운할 것 없다. 봄은 돌아올 것이다. 꽃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대지의 노래’ 후반부 절반을 차지하는 마지막 악장 ‘송별’은 이렇게 사라지듯 끝을 맺는다.

“나는 고향을, 내가 있을 곳을 찾아가리.
다시는 먼 곳으로 떠돌지 않으리라.
내 마음은 고요하고, 그 때를 기다린다!
사랑하는 대지 어디에나
봄이면 꽃이 피고, 다시 새롭게 푸르러진다!
그 어디나, 영원히 저 먼 곳에는 푸른 빛이!
영원히… 영원히…”

[말러 ‘대지의 노래’ 6악장 ‘송별’]

유윤종 음악평론가·클래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