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에이듯 추운 영하 12도의 겨울 새벽,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중무장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건물로 들어간다. 문을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그곳 특유의 향이 가장 먼저 사람을 맞이한다. 차디찬 새벽 공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오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서둘러 몸을 씻는다.

호루라기 소리, 물소리, ‘왕왕’ 울리는 다양한 소리와 더 가까워진 그곳의 향이 사람들을 하나둘씩 빠져들게 한다. ‘첨벙, 첨벙.’

결의에 찬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무언의 눈빛으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 후 눈을 가린다. 이제 각자의 세계로 순서대로 빠져든다. 그들을 무겁게 끌어당기던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은 점점 약해지고, 소리는 서서히 사라진다.

끝까지 깨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흐릿했던 머릿속 두 선이 하나로 일치되며, 몸은 주욱 앞으로 나아간다. 명료하고 빠르게, 진하고 깊게, 선명하고 굵게.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을 제거하고 나면 사람들은 탈피를 마친 애벌레처럼 달라져 있다. 추위에 가시처럼 돋아 있던 피부는 달궈지고, 화가 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어대며,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수탉처럼 몸을 집어 던진다. 소리도, 냄새도, 시야도 한층 둔감하고 흐릿한 그 안에서 그들은 그저 직진만 할 뿐이다. 멀리서 굴곡져 보이는 앞사람의 발끝에 거는 희망. 힘들어도 의지할 곳은 그 발끝뿐이다.

그곳에서는 계급도 나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와 눈은 가려지고, 몸은 벌거벗은 채로 각자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조금 더 평등해지는 공간. 혼자이면서도 암묵적으로 연결되고, 서로 얽혀 있는 ‘여럿의 장소’다.
글•그림. 이지현, 『수영장』-말없이 이어지는 몸의 리듬과 시선으로, 물속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2015년 미국 일러스트레이터협회 ‘최고의 어린이책’ 선정 / 출처. 교보문고
글•그림. 이지현, 『수영장』-말없이 이어지는 몸의 리듬과 시선으로, 물속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2015년 미국 일러스트레이터협회 ‘최고의 어린이책’ 선정 / 출처. 교보문고
극심한 빈혈로 7년을 맥없이 보내다가 시작한 수영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름 YMCA 어린이 수영단 출신으로 물과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20년 만에 시작한 수영은 시작과 동시에 발차기 몇 번 후 25m 중간에서 멈춰서서 숨을 헐떡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물에서 나오고 말았다.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지만, 수천 명이 나만 바라보는 듯 부끄러웠다. 이를 악물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물에 몸을 던져 악착같이 같은 궤적을 돈 지도 어느덧 수년째.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처음엔 공포였던 수영은 어느 순간 집착이 되었고, 지금은 내가 살아 있음을 가장 또렷하게 확인시켜 주는 내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무언가에 덕후가 되어간다는 건,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삶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변해간다는 뜻이다. 행복감과 목적의식, 설렘과 성취, 좌절과 실패, 그리고 다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순환. 덕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삶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참, 하루하루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몰라요.” 환갑은 거뜬히 지나신 회원님이 머리를 말리면서 뱉어낸 말에, “웃어, 웃으면 그냥 지나가고, 웃으면 행복한 거야. 그걸로 된 거야.” 칠순은 거뜬히 지나신 회원님이 툭 하니 답하신다.
글•그림. 유진, 『수영장에 간 아빠』-아빠와 아이가 함께 물에 들어가며 발견하는, 서툴지만 진심 어린 교감의 순간들을 담았다. / 출처. 알라딘
글•그림. 유진, 『수영장에 간 아빠』-아빠와 아이가 함께 물에 들어가며 발견하는, 서툴지만 진심 어린 교감의 순간들을 담았다. / 출처. 알라딘
파르스름 젊을 때는 ‘매사에 감사’하라는 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일종에 가스라이팅 문구 같아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바이 쫀득 쿠키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겨우 두 개를 손에 넣었을 때, 족집게로 새치를 한가닥을 단번에 뽑아냈을 때, 카페에서 나눠주는 무료 시식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받았을 때, 엄마가 명절날 싸준 음식이 동생네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을 때, 금요일 밤 시계를 봤는데 아직 8시 50분일 때, 추운 날씨를 견디며 수영장에 갔는데 “신년 운수대통하세요.”라며 백설기를 건네받았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매사에 감사하게 되고,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되뇐다.
[좌] 글•그림. 염혜원, 『수영장 가는 날』-두려움과 설렘 사이, 처음 수영장에 가는 아이의 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이야기 / 출처. 예스24  [우] 글•그림. 박소정, 『풍덩 수영장』-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담은 청량한 여름날의 모습을 그렸다 / 출처. 예스24
[좌] 글•그림. 염혜원, 『수영장 가는 날』-두려움과 설렘 사이, 처음 수영장에 가는 아이의 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이야기 / 출처. 예스24 [우] 글•그림. 박소정, 『풍덩 수영장』-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담은 청량한 여름날의 모습을 그렸다 / 출처. 예스24
소란스러움도 없이, 조용히, 순서대로 물속의 무한궤도를 그리며 오늘의 새벽을 건너온 수영 덕후들 덕분에,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변해간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집착하는 행위는 결국 나를 매일 같은 자리로 데려다 놓는 힘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성취들, 기록되지 않는 반복, 칭찬 없는 새벽들 속에서 사람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물속에서 숨을 고르고, 팔을 뻗고, 발차기하며 나는 매번 아주 사소한 선택을 한다. 멈출 것인가, 갈 것인가.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