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처음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샹들리에 조명이 휘황찬란한 극장 로비로 들어갈 때부터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뉴요커들 중에서도 최고로 세련된 사람들이 오겠지, 다들 얼마나 잘 차려입었을까. 그런데 막상 로비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그 공간을 거닐거나 날씬한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숙녀들은 대부분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유럽의 공연장에서도 검은색 의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뉴욕처럼 관객의 절대 다수가 검정으로 통일하다시피 한 경우는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다행히 나도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역시 애매할 때는 블랙이 정답인 것이다. 웅성거리는 신사 숙녀들 너머로 낮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았던, 검정 드레스를 입은 또 다른 여성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갔다. 제목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 같은 ‘마담 X의 초상’ 말이다.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초상 속 주인공들은 적당한 부자나 졸부가 아닌 진짜 부자, 말하자면 ‘올드 머니’들이다. 화가의 윤택하고 자신만만한 붓질 아래에서 수없이 많은 부유한 숙녀들, 고상하거나 냉혹한 표정의 신사들, 귀족들과 심지어 두 대통령의 모습까지 새롭게 탄생했다. 사전트가 그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급한 성격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모습에는 학자적인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인물을 보는 화가의 예리한 시각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아무리 거절해도 밀려드는 청탁을 어쩌지 못했던 이 초상화의 대가가 스스로 가장 잘 그린 초상으로 꼽은 작품은 1884년에 완성한 ‘마담 X의 초상’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모델의 이름이 붙어있지 않다. 그림이 큰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모델에게 ‘나쁜 여자’의 낙인이 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존 싱어 사전트,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상화, 1903. / 필자 제공
사전트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금수저 화가’였다.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미술에 자질을 보이자 일찌감치 파리 유학을 주선했다. 풍요롭게 자란 사전트는 자신에게 익숙한 풍요로움을 그리는 데 누구보다 능했다.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국전인 살롱전에 다섯 번 연속으로 입상하며 젊은 화가는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1886,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 필자 제공
1880년, 사전트는 파리에서 같은 미국인인 버지니 아멜리에 고트로 부인을 만났다. 사전트보다 세 살 아래인 고트로 부인은 스물한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결혼한 여성이었다.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인 버지니 아멜리에는 남북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와서 열아홉 살에 자신보다 스무 살 많은 갑부 피에르 고트로와 결혼했다. 사전트와 만났을 당시에 버지니 아멜리에는 독특한 미모로 이미 파리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사전트는 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초상을 그리기로 결심했고, 주저하는 버지니 아멜리에를 설득해 실물 크기의 대형 초상을 그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버지니 아멜리에가 탁자를 짚은 채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있는 포즈의 초상이었다. 그림을 빨리 그리는 사전트에게도 이 초상의 완성은 거의 1년이 걸렸다. 사전트는 초상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그림은 화가의 기대대로 입선했다.
1884년 5월, 살롱전이 개막되었다. 고트로 부인의 초상은 개막부터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화제는 화가의 예상과 달리 부정적인 쪽이었다. ‘그림이 너무 야하다’는 것이었다. 한 번 시작된 악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림의 모든 부분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모델의 살결이 너무 희다든가, 드레스의 한쪽 어깨끈이 흘러내리고 있다든가, 모델이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든가, 귀가 너무 빨갛다든가 등등. 모델의 흰 살결은 시체 같다는 비난을 들었고 흘러내린 어깨끈은 관객에게 던지는 추파로, 정면을 보지 않는 시선은 관객을 무시하는 거만함으로 해석되었다. 심지어 빨간 귀는 모델이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까지 실렸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림에 대한 비난은 파리 사교계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워졌다.
큰 충격을 받은 사전트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런던으로 이주한 사전트는 1886년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라는 서정적인 그림으로 좋은 평을 얻으며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귀족 부인과 유대인 부호들의 초상 요청이 몇십 년간 꾸준히 이어졌다. 사전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타계할 때까지 명예와 경제적 여유를 한껏 누렸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젊은 날의 사전트에게 큰 상처를 남긴 버지니 아멜리에의 초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버지니 아멜리에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전트 입장에서는 이 그림을 넘길 곳이 없었다.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의 초상, 188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필자 제공
1916년, 예순이 된 사전트는 버지니 아멜리에의 초상화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넘겼다.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어깨끈은 고쳤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본 그대로였다. 그림을 인수한 미술관 측은 모델의 이름을 물었다. 초상화에는 모델의 이름으로 제목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버지니 아멜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사전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던 삼십여 년 전의 잔혹한 비평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사전트는 “그냥 마담 X의 초상이라고만 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이 이 그림의 제목이 ‘마담 X의 초상’이 된 사연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는 이 초상이 유난히 음란하거나 퇴폐적인 그림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 파리의 언론과 비평가들은 왜 그토록 가혹한 평을 퍼부었던 것일까? 문제는 의외로 간단했다. 버지니 아멜리에는 나이 많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한 외국 여성이었다. 파리 사교계의 입장에서 그녀는 환영할 수 없는 이방인, 사교계의 물을 흐린 ‘나쁜 여자’였다.
작곡가를 죽게 만든 ‘나쁜 여자’ 카르멘
사실 파리는 버지니 아멜리의 초상화 스캔들이 있기 십여 년 전에 이미 또 다른 ‘나쁜 여자’를 축출했던 경험이 있었다. 1872년, 작품이 영 팔리지 않아 편곡으로 생계를 잇고 있던 작곡가 조르주 비제(1838~1875)에게 고대하던 오페라 청탁이 왔다. 이 해 공연된 연극 ‘아를의 여인’ 극 부수음악이 호평을 얻으면서 파리의 극장인 오페라 코믹이 비제에게 신작 오페라를 의뢰한 것이다. 비제는 작가 프로스페로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을 대본으로 택했다. 세비야의 집시 처녀 카르멘이 순진한 병사 돈 호세를 유혹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줄거리였다. 마지막 4막에서 돈 호세는 자신을 거부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려는 카르멘을 죽이고 만다.
[오페라 <카르멘> 중 ‘사랑은 자유로운 새와 같이(하바네라)’. 엘리나 가랑차(메조소프라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페라 코믹은 대본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제는 대본을 고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극장과 작곡가 사이의 실랑이 속에서 공연은 자꾸 지연되었다. 1874년 10월 리허설이 시작되었으나 가수들이 무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거부하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 1875년 봄의 초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가수와 오케스트라 간 사인이 맞지 않아 공연은 자정 이후까지 늘어졌다. 관객과 언론은 일제히 ‘카르멘’을 비난했다. 주인공 여성이 빈한한 신분이며, 오페라에 늘 등장하는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나쁜 여자라는 점, 무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지중해의 정열이 번득이는 오케스트라 선율이나 탁월한 아리아들에 대한 평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카르멘의 행실과 신분만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조르주 비제 '카르멘' 초연 당시 포스터, 1875.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카르멘’ 공연의 실패와 혹평은 안 그래도 병약했던 작곡가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1875년 5월, 비제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졌다. 자신의 결혼기념일인 6월 3일에 비제는 서른 일곱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 참석한 파리 음악원 동기 샤를 구노는 너무도 운이 없었던 친구를 기리는 추도문을 읽다 울며 쓰러졌다. 비제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카르멘’에 대한 세간의 평이 호의적으로 바뀌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875년 가을에 열린 ‘카르멘’ 비엔나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바그너, 브람스, 차이콥스키가 모두 작품을 격찬했다. 1880년 무렵에 ‘카르멘’은 전 유럽의 극장과 뉴욕에서까지 공연된, 프랑스어 오페라의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버지니 아멜리와 카르멘은 정말 ‘나쁜 여자’였을까? 19세기의 여성은 의지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여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마땅했을까? 사전트는 요행히 파리를 떠나 런던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운한 작곡가 비제에게는 그러한 기회마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