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말의 해, 2026년이 밝았습니다. 구정 설날을 앞두고 붉은 말을 매개로 서로 다른 접근과 해석을 펼친 AI 예술 전시가 열려 다녀왔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상업 영상 제작 현장에서 활동 중인 VFX(Visual Effects·시각특수효과) 아티스트들의 연합 전시였는데요. 전시명은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1878년 발표한 <움직이는 말(The Horse in Motion)>에서 따왔습니다. 이 연속 사진은 훗날 영화의 기원이 되었죠. VFX 아티스트들은 현대 영상 산업에서 또 다른 변곡점이 되고 있는 생성형 AI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김한율, 태동,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 사진 제공. 김한율
김한율, 태동,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 사진 제공. 김한율
창작자 배경의 다양화, AI 예술의 새 지평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학을 전공한 후 KAIST에서 과학저널리즘을 공부하기로 한 선택은 돌아보니 참 좋은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구실 안이 아닌 현장에서,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기술과 예술을 읽어내는 저널리스트의 시선이 이 시대의 AI 예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AI 아티스트들을 인터뷰하며 알게 된 점은 바로 AI 예술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창작자 배경의 다양화’라는 것입니다. AI 예술의 현장은 특정 전공이나 산업에 속했던 창작자들이 각자의 배경과 감각을 유지한 채 공존하며 매우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기존 현대 미술계에서 주목해 온 작가군이 주로 전통 미술 대학 교육을 기반으로 회화나 조각 중심의 활동을 해왔다면, AI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아티스트들은 패션, 디자인, 건축, 모션 그래픽, 엔터테인먼트, 게임, 테크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상업 예술의 경계에 관한 질문은 미학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깊은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간 뮤직비디오나 방송 광고 영상 등을 제작해 온 VFX·3D 아티스트는 (적어도 전통 미술계의 기준으로는) 작가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AI가 시대의 화두로 부상하며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AI를 활용해 독자적인 미적 실험과 예술 세계를 펼치며 독립적인 작가로 활동할 기회가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VFX 아티스트들이 AI, VFX를 하나의 표현 매체로 삼아 갤러리에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이 제 발길을 끌었습니다.

시각적 완성도를 넘어, 사유의 깊이로

이들은 주로 감각적인 영상 작업을 해왔기에 매력적인 시각적 완성도를 구현할 거라는 점은 기대했던 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놀라웠던 점은 서사의 시각화와 사유의 깊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AI는 철저하게 작가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창작 도구로 녹아들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가로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는지에 귀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그 작품 이야기를 살짝 들려드리며 AI 예술이 얼마나 다채로운 가능성을 품고 진화하고 있는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김성하 작가는 ‘AI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판단을 만들어내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과 ‘인간의 명확한 의도’가 공존하는 이미지 생성 과정에 주목합니다. 작품명은 AI에 입력하는 프롬프트(prompt·명령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카오스’는 프롬프트를 정확히 따르는 AI를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리는 변수입니다. 작품에는 상업적 결함으로 취급되는 AI 생성 이미지 특유의 화질 열화와 불안정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미완의 이미지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작업으로 받아들이며, 인생에서 겪는 생성과 시행착오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AI 기술이 질주할수록, 예술은 인간을 드러낸다
김성하, red horse — chaos 100 — raw — profile Global V7 Profile (Hallucination), 2026, 4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Frame Interpolation, Minimax). / 사진 제공. 김성하
김성하, red horse — chaos 100 — raw — profile Global V7 Profile (Hallucination), 2026, 4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Frame Interpolation, Minimax). / 사진 제공. 김성하
현대 도시라는 차가운 배경 위로 말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을 상실한 채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강준영 작가는 AI로 도시 속 말의 형상을 포착해 맹목적인 질주의 풍경을 기록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속도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중심을 다시 잡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입니다. <콘크리트 노마드>는 “잘 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질주가 삶의 유일한 증명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자아”를 돌아보게 합니다.
강준영, 콘크리트 노마드,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Google Nano banana Pro). / 사진 제공. 강준영
강준영, 콘크리트 노마드,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Google Nano banana Pro). / 사진 제공. 강준영
이승유 작가는 경쟁과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인 경마장을 통해 ‘더 빠르게, 더 많이’라는 경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은유합니다. 출발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 붉은 말은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인 사유, 창작, 판단조차 속도와 효율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AI 기술이 질주할수록, 예술은 인간을 드러낸다
이승유, 붉은 말, 2026, 4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Nano Banana Pro, Reve AI, Kling AI, Hailuo). / 사진 제공. 이승유
이승유, 붉은 말, 2026, 4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Nano Banana Pro, Reve AI, Kling AI, Hailuo). / 사진 제공. 이승유
조수진 작가는 패션 디자인을 기반으로 AI와 3D를 결합해 감각적인 시각 작업을 선보입니다. 작품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품고 끊임없이 달리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손에 쥔 붉은 말은 계속해서 달리기를 재촉하고, 쉼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과 공허가 스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흰 말은 이미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며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더 이상 달리기를 요구하지 않는 흰 말 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을 누입니다. 작가는 달리는 인물의 모습과 흰 말의 부화를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며, 움직임 자체를 부정하거나 판단하지 않은 채 미확정의 가능성을 여지로 남겨둡니다.
AI 기술이 질주할수록, 예술은 인간을 드러낸다
조수진, Still In Motion, 2026, 3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Reve AI, Kling AI, Higgsfield AI) / 사진 제공. 조수진
조수진, Still In Motion, 2026, 3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Reve AI, Kling AI, Higgsfield AI) / 사진 제공. 조수진
스치듯 바라보아도 몇 초 만에 시선이 사로잡히고, 이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유의 깊이를 느끼게 되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미적 안목을 지닌 예술가의 감수성이 나와 결이 맞는다고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러한 영역은 AI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죠. 여러분도 예술과 그런 방식으로 마주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김한율 작가의 불타는 말의 형상을 담은 영상 작품 <재>를 바라보며 그러한 공명을 느꼈습니다. 기술을 통해 서사를 시각화하는 작가는 “완전한 형태가 그슬리며 타오를 때, 상처 입은 존재는 그 자체로 새로운 아름다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파괴와 생성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김한율, 재,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 사진 제공. 김한율
김한율, 재, 2026, 단채널 영상.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Kling AI). / 사진 제공. 김한율
또 다른 작품 <태동>은 마치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떠다니듯 물속에서 유영하는 말의 움직임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은 태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새해에 아직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건축적 미감이 빚어낸 독창성

AI를 활용해 익숙한 이미지나 건축을 낯선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AI 아티스트도 있습니다. 최세훈 작가의 작품이 뚜렷한 차별점을 갖는 지점은 그의 건축학적 배경에 있습니다. 캐나다 조지 브라운 컬리지에서 건축 기술을 배우고, 미국 시카고 기반의 콘 파트너십 아키텍츠(Kohn Partnership Architects)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그는, 첨단 기술과 혁신적 디자인을 접목한 상업 및 공공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구조와 공간을 다루는 설계 경험을 연마했습니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새로운 문은 하나의 문이 닫힐 때 열리고는 합니다. 건축 공학 테크놀로지스트로 경력을 쌓아가던 그는 2023년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고 모든 것을 잃은 듯했다고 합니다. 막막함 속에서 기도가 유일한 닻이 되었던 그 시기, 우연히 접한 생성형 AI 기술은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그가 걸어온 삶의 경력은 퍼즐처럼 맞춰지며 예술가로서 그의 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독창성의 원천이 됩니다. 절망의 순간마저 작가의 서사를 구성하는 예술의 언어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작가는 AI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합니다. DDP 서울라이트에서 선보인 대형 미디어 파사드 작품 <The Valley and the Light>는 그의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작품명에서 '계곡(Valley)'은 인생의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를, '빛(Light)'은 그 안에서 발견한 희망과 새로운 길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의 핵심은, 거대한 이미지가 절망의 시기에 하나씩 만들었던 개별 작업물들을 한데 모아 재구성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최세훈, The Valley and the Light, 2025.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Sora). / 사진 제공. 최세훈
최세훈, The Valley and the Light, 2025.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Sora). / 사진 제공. 최세훈
건축에 뿌리를 둔 그의 훈련된 시선과 안목은 작품에 구조적 개연성이라는 질서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 방식은 AI의 가능성을 탐구하되, 현실의 물리적 법칙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작가는 스스로 "구조적으로 봤을 때 이게 정말 말이 안 된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배제한다"고 말합니다. 몽환과 현실, 기술과 감성의 경계에서 태어난 형상은 누구나 한 번쯤 꿈속에서 마주했을 법한 아득한 기억처럼 다가옵니다.
최세훈, Inflatable Colosseum, 2024.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 사진 제공. 최세훈
최세훈, Inflatable Colosseum, 2024.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 사진 제공. 최세훈
닿지 않는 사랑이 던지는 질문

안재홍 작가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오페라 가수인 아버지와 특수효과 분장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주연을 맡은 오페라 공연을 보며 그는 가상이 현실처럼 작동하는 예술의 힘을 체감했습니다. 이후 영화 연출, 시나리오, 디자인, XR, 미디어 아트를 비롯해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창작에 도입하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작가는 “AI 기술의 가능성이 단지 작업을 간소화하거나 속도를 높이는 데 있지 않다”며, “AI라는 매체를 통해 정서적 소통이 가능한지, 얼마나 깊이 관객의 내면에 닿을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업에서 허구적 서사와 인물, 그리고 시선 맞춤은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인물의 존재감과 시선을 강조하는 이유는 AI 예술에서 기술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감정과 공감을 매개로 관객이 작품과 안정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024년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서 상영된 AI 영상 작품 <사랑해(SaRangHae)>는 국제적 분쟁과 혐오가 확산되는 동시대의 상황에서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안재홍, 사랑해(SaRangHae), 2024.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Runwayml). / 사진 제공. 안재홍
안재홍, 사랑해(SaRangHae), 2024. Artist-directed work created using Generative AI (Midjourney, Runwayml). / 사진 제공. 안재홍
작가는 배우자의 얼굴을 AI 아바타로 구현해 무조건적 사랑의 원형을 시각화합니다. 화면 속 인물은 분명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소리는 처음부터 제거되어 닿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혐오와 타인에 대한 적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겪고 모든 방식이 실패한 뒤에 남는 유일한 희망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끝내 닿지 못한 사랑의 회복”이라고 강조합니다.
안재홍, 사랑해(SaRangHae), 2024. 타임스퀘어 현장 사진 / 사진 제공. 안재홍
안재홍, 사랑해(SaRangHae), 2024. 타임스퀘어 현장 사진 / 사진 제공. 안재홍
AI 시대, 존재로서의 예술가가 전하는 울림

AI 시대에 부상하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들을 만나며 인상 깊었던 점은, 그들 각자가 걸어온 다채로운 삶의 경로가 고유한 예술의 언어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소리가 있었기에 AI는 주체적인 작가의 손안에서 철저히 창작을 돕는 도구로 머물렀습니다. 제게 울림을 준 건 기술적 탁월함이나 현란한 비주얼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속도에 매몰된 삶에 대한 성찰,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계속 나아가는 움직임, 닿지 못한 사랑의 절실함과 그럼에도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처럼,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서사와 시선이 마음 어딘가에 닿아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인간은 합리성과 효율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비논리적이고 감정에 흔들리며 실패와 좌절을 겪고 상처를 통과해 온 흔적을 내면에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추락하는 순간에 날개가 솟아오르기를 바라고,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을 조심스레 바라며, 여전히 꿈을 꿉니다.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AI 시대에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세계와 언어를 지니고, 불안과 한계의 시간을 견디는 힘을 기르며, 무르익는 성숙의 과정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차가운 기술의 언어 대신 온기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다정함을 품고 예술과 사람을 대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표현된 예술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

김민지 아트 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