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족된 욕구가 만든 쇼펜하우어식의 권태가 아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한 발단이 되는 지루함, 이른바 하이데거식의 권태다. 이 권태를 극복하게 해주는 건 세상을 다시 한번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물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사유다. 화가의 거친 붓질의 압력에 캔버스 위로 납작해졌다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형체를 갖추며 요동하는 세계를 보며, 또 그것을 함께 바라보는 익명의 타인들과 한순간 동료가 되어, 마치 같은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관중처럼 그 무용한 시간의 소진 방식에 암묵적 동의와 격려를 얻는 것이다.
대상에서 느낀 경이로움이 단지 머릿속의 감각을 넘어 신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렬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스탕달 신드롬. 그 개념을 처음 알게 해준 건 영화 <바스키아/Basquiat>(1996)다. <웨스트 월드>에서 버나드를 연기했던 친근한 얼굴의 제프리 라이트가 날카로운 턱선에 사방팔방으로 뻗은 머리를 하고서 바스키아를 생생하게 되살리고, 데이비드 보위가 앤디 워홀을 연기하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린 바스키아가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그림보다 더 경이롭게 바라보는 영화의 첫 장면이었다.
그런 감각을 실제로 처음 느껴본 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했었던 반고흐 전(2007년)이었다. 복제된 이미지로 보는 그림과 진품이 그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시 컴퓨터로 영상을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끼며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내게는 유독 그림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앞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소강상태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아무런 변화 없는 그림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그림은 고흐의 아이리스였다.
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 (1890) /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최악의 전시 관람 경험을 준 것도 고흐의 그림이었다. 10년 뒤쯤 파리에 처음 갔을 때였다. 오르세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이루는 줄이 어디가 입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치 겹겹이 쌓여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미술관에 들어갔지만,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는 작은 방에도 사람이 가득 차 있었고, 그림을 보기 위해 다시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내가 그림 앞에 섰을 때 돌연 한 젊은 남자가 내 어깨를 밀치고 내 시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고 핸드폰으로 셀카를 촬영했는데 후면 카메라를 사용했기에 사진을 찍는 남자의 모습과 얼굴, 그리고 그 뒤 고흐의 그림이 마치 인피니티 미러처럼 겹쳐 보였는데 그 남자의 얼굴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림이 있는 공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 때면 동시에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미술관에 가서 조용히 권태로운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무용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충돌한다. 두 개의 상반된 힘이 충돌하며 역설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두 개의 반대하는 힘이 만나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마치 원자가 융합하듯 그 전보다 더 강렬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핵이 될 수 있을까? 역설은 종종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도전 과제다. 하지만 성공은 쉽지 않다. 많은 건축이 콘셉트 단계에서는 그 본질에 반하는 ‘열려있음’을 추구하지만 ‘열린 공간’이라는 단어가 그저 마케팅 수단 정도로 쉽게 전락하는 것처럼 섣불리 역설이라는 콘셉트를 추구하다간 자기모순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테이트 모던에는 세 가지의 역설이 있다. 들어가 걸을 수 있고, 오르내릴 수 있는 이 물리적 공간 안에 충돌하지 않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역설이 구현되어 있다.
안과 밖의 역설 (진입 공간)
이곳은 안이며 동시에 밖이다. 벽과 지붕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이지만 공원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시 흩어지는 외부의 공간처럼 기능한다.
‘열려있음’은 공간이 주는 포용의 감각에서 나오고 그 감각은 대부분 진입 공간에서 결정된다. 세 방향으로 열려있는 입구는 어느 방향에서 걸어오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있고, 기본 입장료가 없기에 입장을 위한 절차는 최소화되어 있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뿐이기에 가방이 없으면 이 절차마저도 생략된다.
예를 들어 강변에서 산책하다가 즉흥적으로 발길을 돌려 이곳에 들를 수도 있고, 건물의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경유에 가는 것도 가능하다. 비가 올 때면 잠시 들어가 머무르는 것도 가능하고,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다면 ‘테이트 모던에서 만날래? 일단 거기서 모여서 다른 데로 가는 건 어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술 작품들과 결합한 실내 공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공고히 하는 건 세 개의 입구 중 터바인 홀이다.
높고 낮음은 구조화된 위계다. 높은 층고는 사람에게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공간의 과밀함에 대한 감각을 완화하기도 한다. 머리 위로 무용하게 남아있는 공간의 깊이는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수직적인 공간의 깊이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실내 광장,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바로 전시실로 연결이 되고,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아트숍이 있다. 경사로를 오르내리다 보면 이곳이 하나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터바인 홀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이 설치된 전시 공간이기도 하다.
1층과 4층에 있는 본관 스위치 하우스와 신관 블라바트닉 빌딩(Blavatnik Building)을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는 사람들의 동선을 유기적인 순환 구조로 연결할 뿐 아니라 이 터바인 홀의 설치 작품과 그곳에 모여들고 흩어지는 사람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런던 테이트 모던, 올라퍼 엘리아슨 'The Weather Project' (2003) / 사진출처. olafureliasson 홈페이지
터바인 홀 뿐만 아니라 다른 전시 공간도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도록 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일부 전시실에서는 개방감을 주는 넓은 창을 통해 템스 강변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물론 6층에 있는 바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보는 풍경이 가장 마음을 트이게 했다. 그곳의 유리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평화는 힘’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평화는 어느 순간에 이뤄지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우리는 단절을 말할 때 ‘담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벽돌은 담을 쌓는 기본 단위다. 쌓는다는 행위는 안과 밖을 구분하고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외부에서 바라본 블라바트닉 빌딩의 자유로운 형태는 이 건축을 해체주의로 오해하게 하지만 안에서 보면 벽돌 사이사이에 틈이 있고 교차해 있어 쌓였다기보다 마치 직물처럼 짜인 느낌이 든다. 건물을 이루는 구조는 콘크리트이고 그 위를 벽돌로 이뤄진 외벽이 마치 베일처럼 덮고 있다.
런던의 건축을 검색하면 유명한 곳들은 대부분 북쪽에 몰려있다.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건물은 이 테이트 모던과 배터시 파크인데 둘 다 발전소를 개조한 건물이다. 웅장한 발전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신시킨 첫 번째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에서 헤르조그 & 드 뫼롱은 ‘Aikido’라는 일본의 전술 용어를 언급하며 적의 힘을 역으로 이용한다는 의미의 이 무술 용어처럼 기존의 힘에 맞서는 대신 이를 흡수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한다.
헤르조크 & 드 뫼롱 - 테이트 모던 프로젝트. 런던 테이트 모던 외관과 내부 모습 / 사진출처. H&dM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본 테이트 모던의 모습은 다소 투박하다. 발전소였던 시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이어온, 수십만 장의 붉은 벽돌이 촘촘히 쌓인 거대한 외벽은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는 진입 공간과 입장하는 순간 시작되는 전시의 경험, 상대의 힘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큰 원을 그리는 무술가의 동작처럼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고 다시 또 주변의 다른 공간으로 되돌려주는 순환하는 움직임에 합류하여 공간 구석구석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다 보니 머릿속에서 충돌하고 있던 역설의 에너지가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잠시 뒤에 이렇게 산책하듯 공원처럼 들를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내가 사는 곳에는 없다는 아쉬움이 인다. 새로운 두 개의 힘이 또다시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 공간을 걸으며 그 안에서 사유함으로 그 충돌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법을 배웠을 테니깐.